[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25회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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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버스 한 대가 승객을 가득 태운 채 힘겹게 산길을 오르고 있다. 라오스의 고도 루앙프라방에서 왕위앙으로 향하는 완행버스였다. 예정된 주행시간은 7시간이었지만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이따금 승객들의 급한 볼일 때문에 고산마을에 멈춰 서기도 했지만 국토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외줄기 도로에서는 황토 흙먼지로 자욱한 산길과 짙푸른 나무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털털거리는 버스 안에는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지역에서 온 배낭족들이 더위와 여행에 지쳐 진즉부터 널브러져 있다.

간단히 요기도 할 겸 중간 기착지에 내려 보니 승객들 중 가장 몰골이 엉망인 사람은 기준이었다.? 며칠째 깍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턱을 뒤덮고 얼룩진 옷가지와 땟국물에 절은 운동화는 가관이었다. 왕위앙 리조트에서 출발한 뒤 라오스 남부의 참파삭부터 거슬러 올라 사반나켓을 거쳐 루앙프라방까지, 기준은 부러 고행을 자처했다. 일부러 더 게을러지려고 했고 어느 때보다 더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다. 사실 리조트 오픈 초기에 이런 시간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뒤 늦게 배낭족 체험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게다가 열흘씩이나?”
총지배인은 기준의 청을 듣고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라오스 관광의 전반적인 실태를 조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기준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설명하기로 했다. 그가 라오스 순례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좀 더? 거시적인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리조트 오픈 직후의 실적은 꽤 좋은 편이었다. 객실은 연일 풀하우스 수준을 유지했고 예약 상황도 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초기의 호실적은 오픈기념 할인 등 초기 홍보와 마케팅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많았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개장 첫 달이 지나자 객실은 눈에 띄게 비어가고 리조트 전체의 방문객도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쟁사인 무사오리조트를 포함한 왕위앙 지역 숙박업체들도 대부분 사정이 비슷하다는 점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직원들 분위기가 크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역 업계가 전체적으로 모객실적이 저조하다는 사실은 뭔가 좀 더 심각한 징후일 수 있었다.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할 터였다. 상황 파악이 빠른 강 전무는 리조트 오픈의 흥분과 설렘이 가시자마자 본사와의 협조체제를 기반으로 불황 타개를 위한 마케팅 전략 구상에 돌입했다.

“세계적인 불황 탓이 크고 저희만의 문제도 아니지만, 기존의 틀에 안주해서는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여행상품 쪽이니만큼 이참에 새로운 관광루트를 개발하고 틈새 상품을 구상하는 기회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자네가 할 일은 여기 남쏭 리조트에 필요한 상품이지 일반적인 관광 여행 상품이 아니라는 것 아직도 모르는가?”
기준이 배낭을 메고 라오스를 돌아보겠다고 하자 못미더운 표정으로 강 전무가 던진 말이었다.
“네, 그 점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리조트와 연관된 상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좀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해법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렵게 얻은 열흘의 시간 동안 그는 철저한 배낭 여행자가 되어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서부터 모텔, 리조트 등지를 골고루 순례하며 관찰하고,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었다. 배낭? 여행자뿐만 아니라 단체 관광객들도 가리지 않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기준은 외모뿐 아니라 행동까지 그들을 닮고 있었고 생각마저 동화되어 갔다. 여행자의 관점에서, 동시에 리조트 상품 개발자의 관점에서 다시 경험한 라오스의 느낌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도시와 마을들이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 조사 여행 기간 동안 기준에게 가장 크게 다가 온 느낌은 ‘고립감’이었다. 관광 개발의 첫 단계가 ‘교통’이라고 한다면 라오스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동남아를 찾는 일반 여행객들이 태국과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로 몰리면서도 라오스 행으로는 바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그 이유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열악한 교통 사정으로 보였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루앙프라방은 라오스 관광의 최우선순위로 꼽히지만 거기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란 실로 만만치 않다. 루앙프라방에서 왕위앙까지 가려면 평균 주행거리 60만 킬로미터가 넘는 낡은 버스로 한계령처럼 험한 길을 쉬지 않고 7~9시간 달려야만 한다. 이렇다 할 휴게소도 없는 첩첩산길은 가볍게 여가를 즐기기 위한 관광객들에게는 끔찍한 행군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곳은 배낭족들의 천국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 환경과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생활은 라오스의 변함없는 매력이며 이러한 가치를 잘 보존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고생은 감수할 수 있다. 고행을 각오하고 찾아오는 유럽의 배낭족들에게는 그런 불편조차 신선한 경험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처럼 자발적이고도 열정적인 여행꾼들은 지금 기준이 찾는 주요 고객 대상이 아니었다. 왕위앙의 남쏭 리조트를 찾는 고객 모두에게 고행마저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배낭족이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준은 노트를 꺼내 ‘고립’과 ‘교통’, 그리고 ‘순수함을 간직하며 소통하려면?’이라고 적었다.?

그때 버스가 멈춰 섰다. 기준이 퍼뜩 고개를 쳐들자 기사는 눈짓으로 내리라는 시늉을 했다. 주섬주섬 배낭을 챙겨들고 내리는데 얼굴을 익힌 승객들이 여기가 어디냐고 궁금한 표정으로 묻기도 하고 몇몇은 차창에 매달려 성호를 그으며 기준을 배웅했다.??
버스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멀어져 가자 기준은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배낭 순례의 마지막 행선지는 안젤라의 마을이었다. 잠시 후 낯익은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안젤라를 만나러 달려오던 그 날의 기억이 기준을 살짝 들뜨게 했다. 숲 사이로 안젤라의 오지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쯤 언덕길을 올라가자 밀짚모자를 쓴 반가운 얼굴이 조무래기들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안젤라가 보이지 않는군요.”
마을을 둘러본 뒤 기준이 말했다.
“타이에 갔습니다. 의사들 모임이 있지요. 사흘 후에나 돌아올 겁니다.”
“저 곳이 의료 센터 건물입니까?”
실망한 표정을 들키기 싫었던 기준이 팔을 크게 들어 눈에 띄는 통나무집을 가리켰다. 마을에서 가장 견고하게 지어진 집이었다.?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하하.”???
마을은 계속 진화 중이라며 루앙이 호탕하게 웃었다. 마을 입구에서 부터 두 사람을 졸졸 따르며 종알대던 아이들이 함께 따라 웃었다. 아이들의 웃음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해맑은 웃음소리가 동심원을 이루듯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중앙의 공터 쪽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로 인도한 루앙이 바나나 술을 권했다. 기준은 루앙이 직접 담갔다는 바나나 술을 벌써 세 잔째 마시는 중이었다.??
“리조트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루앙이 물었다.
“글쎄요, 숙박이나 레저를 위한 시설이라고 대답한다면 만족하지 못하시겠죠?”
기준이 응수하자 루앙은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 생각에 리조트는 하나의 시스템입니다. 자연, 문화, 그리고 사람을 포함하는 시스템 속에서 리조트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변형섭과의 대화 중에, 그리고 배낭족이 되어 라오스를 걸으면서 문득 문득 그는 리조트가 라오스라는 환경 속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직 리조트가 완공된 게 아닐 수도 있겠지요. 터를 닦고 건물 세운 다음 직원들 교육시키고 나면 손님 받을 준비가 끝난 걸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논밭에서 곡식을 수확하려면 꾸준히 물을 대야 하고, 그러자면 반드시 물길을 터야겠지요.”
“그렇게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왜 리조트를 떠난 겁니까?”
기준은 그제야 속에 품고 있었던 질문을 꺼냈다.
“사람들은 나쁜 것을 없애면 좋은 것이 저절로 생겨날 거라 믿곤 합니다. 하지만 없어진 자리는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입니다. 거기다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생각해보십시오.”
“미스터 루앙, 당신이 진짜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빈자리를 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떠났습니까, 아니 리조트에는 왜 왔던 겁니까?”

루앙은 기준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준을 자신의 거처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준은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책들, 여기저기 무더기로 쌓여있는 책더미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책의 제목 또한 영어와 한자, 그리고 라오어로 뒤죽박죽이었다. 불경과 성경에서부터 각종 철학 서적은 물론 건축, 경제에 관한 책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그제야 기준은 루앙의 해박한 지식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짐작이 갔다.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루앙은 책 틈에서 박스 하나를 열더니 그 속에서 둘둘 말린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리고는 넓은 탁자 위에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펼쳐놓기 시작했다. 종이가 다 펴지고 그 종이들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퍼즐로 완성되는 순간 기준의 입이 쩍 벌어졌다. 루앙이 펼쳐놓은 것은 마을 전체를 설계한 도면으로 보였다. 군데군데 채색까지 곁들인 조감도와 함께 일정한 각도에서 바라본 전체 마을의 설계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기준은 설계도 상단에 적힌 굵은 글씨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링크 빌리지 (Link 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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