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9회
? “여기 사람들, 사실은 대부분 실향민들이에요. 원래는 지금 그 리조트 자리에 살던 사람들이죠. 거기 있던 재래시장이며 원주민들 모두 뿔뿔이 흩어졌어요. 왕위앙이 개발될수록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나겠죠.”
리조트 개발로 인해 순식간에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 그 일로 등을 돌린 조카와 외숙부, 그리고 쫓겨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안젤라……. 그녀와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기준의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안젤라는 철거민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은 이들을 쫓아낸 리조트를 위해서 일하게 된 셈이었다. 더 나아가 이곳을 뿌리 뽑힌 사람들을 위한 삶의 터전, 나아가 자신의 의료 활동 근거지로 삼을 계획까지 품은 것이다. 기준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기 주민들, 리조트에 대한 반감이 대단하겠네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리조트가 잘되길 바라죠. 매일 기도하는 걸요.”
“정말? 그렇다 해도 그 속마음이야…….”?
“거기 직원들 중에 여기 출신들도 몇 명 있어요. 물론 말단 허드렛일에다 비정규직이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 월급으로 가계를 잇고 있죠. 리조트가 완공되고 관광객들도 많이 찾게 되면 점점 더 나아질 거라 믿고 있어요. 땅은 빼앗겼지만 대신 거기서 새로운 희망으로 살아갈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죠.”
“그렇군요. 그런데 안젤라의 생각은 어때요?”
기준이 무심한척 물었다.?
“본사 차원에서 철거민들에 대한 대책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지만 위앙짠 주정부와 리조트가 서로 미루다가 그냥 흘러가버렸죠. 삼촌의 진심을 잘 모르겠어요. 결국 몇 명 채용 해주는 것으로 보상은 다 끝나버린 셈이지요.”
“그래서 안젤라가 직접 나서기로 한 건가요?”
그 말에 안젤라가 기준 쪽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그래서 라니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솔직히 조금 혼란스럽네요.”
기준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버렸다.
“뭐가 혼란스럽다는 것인지?”
“리조트가 주민들에게 진 빚을 혼자서 다 떠맡겠다는 것도, 이런 오지에 마을이며 의료봉사자 교육장을 만들겠다는 것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성도 희박하고요.”
“그런 말을 기준 씨한테서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 기준 씨만큼은 나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해는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안젤라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 옆에서 지켜보기 힘들 때도 많아요. 물론 안젤라 뜻은 존중하지만 때로는 자기 틀에 너무 갇혀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마치 원칙의 수호자처럼.”
“원칙의 수호자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기준씨는 그렇지 않은가요?”
안젤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준 씨, 참 낯설게 느껴지네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기준은 가슴이 서늘해지며 요즘 지나치게 즉흥적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부딪혔다. 기준은 그녀의 눈을 오래 응시하기 힘들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정리되지 않은 채 계속 토해낼 수는 없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신념과 행동 사이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기준 역시 그런 적이 있었다. 서번트 투어를 출시하고 진행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기억이 있다. 소신과 원칙을 지켜서 마침내 목표를 이룬 그 때의 체험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팀은 해체되고 동료들은 흩어졌으며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임무를 띤 채 낯선 공간에 내던져져있다. 디딘 곳이 땅이 아니라 둥둥 떠다니는 빙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극지 탐험가처럼 그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리자 안젤라는 간이 숙소에 잠든 환자들을 일일이 둘러보기 시작했다. 기준은 멀찌감치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밤이 깊었지만 기준은 마을을 떠날 수 없었다. 안젤라를 향한 간절했던 마음과는 달리 예상치 못했던 거리감마저 생겨버린 상태에서 발걸음을 떼기는 더욱 힘들었다.
그녀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것인가? 외숙부를 대신해서 마음의 빚을 갚고 싶은 거라면 대체 얼마나 머물러야 하나? 그녀는 이 오지를 실향민들의 근거지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자면 리조트의 정책과 부딪칠 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기준은 안젤라의 계획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직감했다.?
‘안젤라와 나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기준은 안젤라와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 난민촌에, 또 한 사람은 그 반대편인 리조트에 서있다.
?“기준 씨, 자주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거기 일에 집중하세요. 난 내 일을 하고 기준 씨는 기준 씨 일을 하고…….”
안젤라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안젤라 신경 쓰지 말고 원칙대로 하면 된다는 말. 알았죠?”
기준은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안젤라가 다가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기슭으로부터 밤안개가 몰려들었다. 두 사람의 침묵 때문에 더 슬퍼지기라도 한 듯 숲의 어둠은 유난히 우울해 보였다. 기준은 그곳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리조트로 돌아오는 동안 기준의 눈앞에는 안젤라의 야윈 얼굴이 끝없이 맴돌았다. 그녀는 고향을 잃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점점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 마을을 건설하고, 그곳을 의료봉사활동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계획까지 품고 있다. 하지만 일의 규모로 보면 주정부나 웬만한 건설회사가 달려들어도 쉽게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도울 수도, 방관할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답답했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그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녀를 지켜보는 것뿐인가.’
안젤라의 마을과 왕위왕 리조트 사이의 두어 시간 거리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다. 기준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거리가 한 없이 멀어질 수도 지극히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리조트를 밝힌 불빛이 보일 무렵, 기준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새겨 넣기 시작했다. 기준에게 리조트는 더 이상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다. 리조트는 이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켜보는 망루가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