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2회

“조난당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게 되는 진짜 원인은 수치심이나 자책감 때문이래요.”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무숙자가 말했다.

무숙자는 기준이 동남아를 누비며 서번트투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그림자처럼 곁을 지켜온 소중한 후배였다. 늘 함께 비행기에 올랐었지만 이제 더 이상 동행할 수 없게 된 것에 못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책감 때문에?”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왜 이런 모험을 시도했을까, 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자책감은 비관으로 이어지고 비관은 생존 희망이나 의욕을 더 갉아먹고, 점점 더 부정적으로 된다는 거죠.”

무숙자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남은 감정 다 버리고 떠나세요, 형.”

무숙자는 언제부터인가 ‘선배님’이란 호칭 대신 ‘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남은 감정이라…….”

기준은 무숙자의 말을 이해했다. 프로젝트와 팀을 지켜내지 못한 자책감, 그리고 형제처럼 소중한 팀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위기에 처한 마당에 혼자서만 살 길을 찾아 떠난다는 죄책감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누구보다도 옳은 원칙을 지키려 애를 썼고 우역곡절은 많았지만 진정과 열정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지 않았던가. 하지만 서번트투어 사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경제 위기 탓, 시장 환경 탓으로 돌리기엔 상실감이 너무 컸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성공했었잖아. 그런데 거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정상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고개 하나 겨우 넘었을 뿐이었지.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나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팀, 아직 살아있어요. 형은 라오스에서, 그리고 전 본사에서 다시 토대를 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위대한 비즈니스가 완전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 말입니다.”

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어떻게?’라는 의문이 마음 속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출국 게이트 앞에서 손을 내미는 기준에게 무숙자가 다짐하듯 소리쳤다.

“형, 조난은 실패가 아니라 모험의 필수 과정이래요. 부디 건투를 빌어요!”

기준은 회상에서 깨어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공항에서 출발한지 어느덧 다섯 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현장에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했지만 여전히 그는 어둠
속에서 속절없이 헤매고 있었다.

기준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때 신기하게도 저 멀리서 불빛 한 점이 아른거렸다. 그래, 방향이 틀린 것은 아니었어. 기준은 본능적으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아스팔트가 끝나고 다시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울퉁불퉁한 길을 가까스로 지나자 나무판자로 만든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왕위앙 남쏭 리조트 개발 현장 5km’

기준은 아예 차를 세우고 팻말을 재차 확인했다.
사방은 여전히 침묵과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지만 리조트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기준은 불빛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잠시 후 기준은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차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30여 분 간의 악전고투 끝에 그는 결국 손을 들었다. 그나마 천만 다행으로 차가 빠진 곳이 지대가 높아 물에 쓸려갈 위험은 크지 않았다. 그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차 안에서 등받이를 뒤로 젖힌 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마음을 정하자 온 몸에 숨어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연거푸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눈을 감자 머릿속에 여러 생각의 편린들이 소용돌이쳤다.

“훌륭한 길잡이란 어떤 사람일까?”

북한산에서 박 대표가 던진 질문이었다.

출국하기 일주일 전, 박 대표는 인사차 찾아간 기준에게 뜬금없이 북한산 등반을 제안했다. 한때 경쟁사의 임원이었던 그는 여행컨설팅 회사를 설립하면서 인생의 2막을 시작하고 있었다.
기준은 업계의 선배이자 인생의 조언자인 그를 늘 존경해오던 터였다.

“훌륭한 길잡이라면…, 글쎄요, 누구보다 많은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렇겠지? 그럼 나도 이 북한산에서만큼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겠군.”

“아마 그럴 겁니다.”

“헌데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도 유능한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예?”

“…어쩌면 훌륭한 길잡이란, 많은 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싶네.”

기준은 걸음을 멈추고 박 대표를 쳐다보았다. 박 대표는 길 옆 바위에 걸터앉아 말을 이어갔다.

“라오스라고 했나? 익숙하지 않은 곳이로군. 게다가 리조트 일이라….”

“솔직히 막막합니다.”

“어떻게 일할 참인가?”

“그야 뭐, 제 원칙대로 소신을 갖고 뛰어들어야죠.”

“마음자세가 아니라 방법을 묻는 걸세.”

“… 방법을 알면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겠죠. 그래서 선배님을 찾아왔고.”

기준의 대답에 박 대표는 미소를 지었다.

“리조트 업무에 관한 매뉴얼이라도 필요하단 얘긴가? 그런 거라면 내가 아니라 리조트 전문가들을 찾아가야지.”

“그건 아닙니다. 지금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찾아왔습니다. 형제 같았던 동료들은 죄다 뿔뿔이 흩어지고 저는 생판 모르는 곳에서 엉뚱한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거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저도 갈 곳이 없어질 판이죠.”

“모두 다 같은 처지야. 늘 익숙하게 걷던 길이 사라진 셈이지. 내로라하던 길잡이들도 우왕좌왕하고 있어. 길을 잘 아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고, 그런 사람을 찾았다 해도 신뢰할 수 가 없네.”

박 대표의 숙인 이마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나름 여행업에 대해서 뭘 좀 안다고 여행컨설팅 회사를 차렸는데 이제 와서 보니 나 역시 그저 뒷산 길잡이일 뿐이더군. 여행업만 해도 지금까지의 원칙이나 기준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들이 너무 많아. 그래서 더욱 새로운 해결 방법이 필요하네.”

“하지만 일의 원칙이나 기준은 요즘 같이 모두들 좌표를 잃고 흔들릴 때 더욱 필요한 것 아닌가요?”

기준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박 대표가 고개를 들어 기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좌표를 보면서도 갈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 그렇기 때문에 지금 더욱 중요한 문제는 원칙을 실행하는 방법이란 말일세.”

폭우 속에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멀리 깜박이는 불빛은 길 잃은 나그네를 유혹하는 북극성이었다. 하지만 기준은 더 이상 그 곳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어둠 속에서 라오스의 비바람을 맞으며 밤을 지새울 수 밖에 없다. 가야 할 목적지는 알고 있지만 그 곳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기준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라오스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