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26회
설계도를 살피는 기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전문가의 솜씨는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 수정하고 보완하며 조금씩 완성해 나간 정성이 그대로 느껴졌다. 학창시절 제도 책상에 앉아 숱한 밤을 새워 가며 설계도를 그려본 기준이었지만 이 만큼 공을 들인 설계도는 처음이었다.
“건축전문가에게 보이기가 참 부끄럽군요.”
설계도에 의하면 지금 조성되고 있는 마을은 그저 한 귀퉁이에 불과했다. 루앙이 구상하는 링크빌리지는 마을 앞을 지나는 국도를 품은 채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양쪽으로 펼쳐진 형태였다. 조감도와 대조해보니 한쪽은 휴게소를 갖춘 전통마을로 보였고 다른 한쪽은 각종 전시관과 행사장 등을 고루 갖춘 복합 공간으로 판단이 되었다.
“도대체 언제 이걸 다 구상 했습니까?”
“백두노인이 도와주셨지요.”
루앙이 웃으며 대답했다.
“백두노인이요? 그 분은 어떤 분인가요? 여기 함께 계신 분인가요?”
질문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하하, 천천히 말씀드리지요.”
“그건 그렇고 하필 왜 링크빌리지입니까?”
“연결을 다시 회복하자는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 촌락과 도시와의 연결을 이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링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생각도 백두노인과 관련이 있나요?”??
기준은 설계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루앙을 보챘다.
?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화엄경의 한 자락을 붙들고 고민하던 그가 외국 유학의 행운을 잡게 되었을 때 영국에서 만난 분이 백두노인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과정과 관계로 설명하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그러니까 영국의 백두노인 철학자께서 링크빌리지의 아이디어를 주신 셈이군요.”
“처음 발상은 여기 라오스의 친구들로부터 시작되었고요, 백두노인께서는 저의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믿음을 주신 것이지요.”
“저는 잘 모르지만, 화이트헤드라는 분은 사상의 대가이시기도 하거니와 그 사상이 어렵기로도 유명하다고 알고 있는데, 직접 배우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준은 자연스럽게 감동하는 표정이 되어 말을 거들었다. 지금은 지방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 동아리 선배에게서 언젠가 귀동냥했던 기억을 가까스로 되살렸다.
루앙이 기준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사실은 영국에 가서 보니 벌써 50여 년 전에 돌아가셔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백두노인께 직접 배웠다면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네? 그러면 화이트헤드 아니 백두노인을 만난 적이 없다고요?”
기준이 루앙의 말을 알아듣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루앙은 원래 수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캠브리지에 적을 두었는데 어찌하다 캠브리지 출신의 대수학자인 화이트헤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정작 수학은 멀리한 채 그의 사상에 빠져서 철학 공부만 하다 제대로 학위도 받지 못한 채 돌아왔다고 했다. 아무튼 링크빌리지는 청년 루앙의 치열한 고민 과정을 토대로 구체화되어 건설되기 시작한 실험마을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한 끝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백두노인께서는 아마도 ‘관계의 진화’라고 부르셨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 우리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겠지요.”??
관계의 진화 속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 기준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마침 눈에 보이는 설계도의 몇 군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거 생태마을이군요.”
그러자 루앙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말하자면 생태 실험마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방법이지요.”
“자재는 나무와 흙뿐입니까?”
“철근 콘크리트에 첨단공법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허허.”
“정말 이런 마을을 정말 건설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내가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계속 이어서 하겠지요. 나는 내 몫의 일을 감당할 뿐입니다.”
그러나 기준은 현실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버스도 서지 않는 오지의 마을이 링크빌리지라니.
“게다가 문명을 받아들인다면 금세 파괴될 텐데요.”
“그것도 실험의 과정이겠지요. 처음에는 루앙프라방과 왕위앙을 잇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겁니다. 아시다시피 너무 멀고 험하지 않습니까? 중간에 그럴싸한 휴게소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솔직히 버스 타고 장장 여덟 시간 넘게 산길을 가자니 엄두가 안 나더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준은 이 마을이 도시와 도시를 잇는 연결 기능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은 이대로 꿈처럼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그냥 간직하는 게 좋으리라. 적어도 조감도 상으로는 너무도 아름다운 마을이었던 것이다. 그 생각을 눈치 챘는지 루앙이 말했다.
“순수한 것, 아름다운 것, 옳은 것……,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것들이 파괴되지 않고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품에 안고 울타리를 쳐서 가능한 한 외부의 변화를 차단하려고 하지요. 고립시켜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지요. 그건 마치 사막 한 가운데에서 비닐하우스를 지어놓고 꽃을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꽃밭으로 만들려면 비닐하우스를 크게 짓기보다는 사막을 옥토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좋은 것들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내가 꿈꾸는 라오스의 미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딪혀 싸울 용기와 전략적인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혹시 압니까? 이 마을이 루앙프라방과 왕위앙을 잇는 또 하나의 라오스 관광지가 될 지.”
“안젤라도 알고 있나요?”
루앙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처음입니다.”
“왜 저한테?”
“애초에 리조트에서 일하게 된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대답한 겁니다.”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루앙은 설계도를 다시 둘둘 말았다. 그리고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왕위앙은 고립된 관광지였습니다. 작고 동떨어져있지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리조트가 들어서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루앙프라방처럼 세계적인 관광지라면 모를까, 왕위앙은 소수의 배낭여행객들만 찾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두 개의 리조트가 한꺼번에 생겼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관광 수요는 생각하지 않고 우선 짓고부터 보자는 식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 나른한 나라에도 이제 변화가 시작되는 거라고 말입니다.”
“어떤 변화인가요?” 기준의 목소리에 긴장이 들어갔다.
“고립에서 연결로의 변화입니다. 리조트가 살려면 우선 왕위앙의 고립부터 끊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루앙프라방과 왕위앙 사이의 거리를 좁혀야 하지요. 라오스는 조각난 관광지입니다. 외따로 떨어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연결시킨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겁니다.”
루앙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고스란히 기준에게 전해졌다. 루앙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그것은 ‘고립과 소통’이라는 대립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었다. 그동안 그가 남쏭 리조트와 링크빌리지를 오가며 골몰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감이 잡혔다. 기준은 순간 정신이 아뜩했다. 자신은 최근에야 겨우 어설프게 알아가고 있는 생각을 루앙은 벌써부터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떠나지 말았어야죠.” 기준의 마음속에 공연한 반발심이 들었다.??
“떠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당신을 다시 만났으니까.”
루앙과 눈이 마주친 기준은 그저 멍한 표정이었다. 그가 리조트를 떠난 뒤에도 기준은 내내 그 빈자리가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런 느낌은 최대치로 고조되고 있었다. 비어 있던 자리에 루앙의 비전(vision)이 들어차기 시작한 것이다.
“링크빌리지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고 계시죠?” 기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처음 이 곳에 마을을 짓기로 했을 때만큼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엄두가 안 났었지요. 하지만 하니까 되더군요.”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이 사람들을 다 어떻게 설득했죠?”
“때로는 단순한 기능이 의지를 키우기도 하지요. 저기 지붕 얹고 있는 소년을 보십시오. 저 집 한 채를 저 녀석 혼자 짓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십대 후반쯤 돼 보이는 소년 하나가 지붕 위에 올라가 대나무를 엮고 있었다.
“설마요.”
“처음에는 대나무 손질하는 법부터 가르쳤습니다. 그것만 반 년 동안 하더니 나중에는 기둥을 세우더군요. 저 녀석은 이제 집 짓는 순서를 훤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수십 개의 단계를 거쳐야 했지요. 엄두가 안 날만큼 거창한 일을 하려면 순서를 정해서 단계를 끝없이 세분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까지 세분화시키는 겁니다. 그런 다음 단계적으로 성취해나가는 체험을 거듭 거듭 반복합니다. 일이 만만해질 때까지. 그 뒤로는 자기만의 집짓는 법이 생겨나지요. 거듭된 반복과 습관이 마침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그날 기준은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하룻밤을 묵었다. 루앙과의 대화는 늦도록 끊이지 않았다. 루앙은 기준의 마음을 모른 채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이, 비슷한 질문에도 매번 지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루앙은 버스가 서는 곳까지 기준을 안내했다.
“코끼리는 잘 있지요?”
기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그나저나 제가 올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요. 만일 오면 우리는 연결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기회에 만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멀리 고개 아래쪽에서 버스의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준은 배낭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깨끗한 공기 때문인지 머리는 전에 없이 맑은데, 이상하게도 배낭은 물먹은 솜처럼 한 없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