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24회

“형, 축하주 한 잔 해야죠?”
무숙자의 목소리가 기준의 상념을 깨웠다.
“어, 미안! 박 대표님은 어디 계셔?”
“야외 바에 앉아계세요. 우리끼리 벌써 샴페인 땄습니다. 후래삼배 각오하세요.”
무숙자와 함께 야외 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테이블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무성한 잎사귀들, 트라웃 나무의 그림자 속에서 박 대표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기준은 한껏 고개를 숙였다. 박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세 사람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바텐더를 퇴근시킨 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모처럼 한 자리에 어울린 만큼 그들은 즐거웠던 추억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며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박 대표와 무숙자는 기준의 얼굴에 서린 고민의 흔적을 눈치 챘고, 기준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마음의 짐을 하나씩 꺼내보였다.

“이 리조트에는 총지배인님 방식도, 부지배인의 방식도 아닌 그 무엇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찾기가…….”
박 대표는 기준의 어깨를 툭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자넨 제대로 가고 있을 게야. 이제 막 기차역을 떠났는데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레 걱정하는 것은 아니야?”
“그럼요, 길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잖아요. 여유를 가지세요. 여긴 라오스잖아요.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라오스 사람들은 천천히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던데요.” 무숙자가 박 대표의 말을 거들었다.
“사실 저는 제가 길을 잘 못 들어설까봐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속도에 뒤쳐질까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기준이 머리를 흔들었다.????

무숙자가 슬그머니 어깨를 기대왔다. 기준은 무숙자의 술잔에 건배를 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리조트는 문을 열었다. 이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또 어떤 변화가 닥쳐올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리조트에 대한 총지배인의 집요할 정도의 가족주의적 애착과 강 전무의 냉정한 기능주의적인 운영방식 속에서 구성원들은 혼란을 겪어왔다. 그리고 지금은 치밀한 시스템과 유연한 자발성 사이에서 또 다시 넘어지고 부딪히면서 일에 적응해 나가야 한다.

라오스 현지 직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상황에 대응해 나갈 것이다. 어차피 겪어야 할 과정일 수도 있고, 그걸 피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하루 동안 발생한 숱한 문제점들을 돌이켜보면 라오 프로그램의 보완이라는 해법만으로는 문제가 쉽게 풀리 지 않을 거라는 우려를 버릴 수 없다.

“직원들에게는 매뉴얼에 입각한 하드 트레이닝이나 치밀하게 구성된 시스템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를테면요?”
“그러니까 리조트에서 자신들이 맡은 일이 차지하는 의미나 혹은 사명감 같은 것 말이지.”
“그것 봐요. 형은 이미 길을 알고 있잖아요.” 무숙자가 동의를 구하려는 듯 박 대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자네는 이미 자네가 어느 방향으로 얼마의 속도로 가야할 지 가늠을 하고 있다고. 그건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일세.” 박 대표가 온화한 미소로 기준을 바라보았다. 기준에게 안도감을 주곤 하던 그 온화한 미소 앞에서 모처럼 술기운까지 오른 기준은 말이 많아졌다. 그는 루앙이 말한 통찰의 힘에 대해서, 그리고 안젤라의 오지마을과 개인적인 갈등까지 두서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루앙이라는 친구가 이야기했다는 ‘변화 속에서 예측하고 관계 속에서 조망한다’는 말, 엄청난 말이군.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말은 쉽고 통찰의 지혜는 구하기 어렵지. 물론 세상을 보는 관점을 거기에 맞췄다면 일단 길 위에 바로 섰다고 볼 수 있네.” 박 대표가 기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겠나? 그 길을 가야겠지. 길을 가되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심을 잘 잡아야 할 걸세.”

“중심을 잡는다고요?” 기준이 눈이 크게 떠졌다.????
“‘시중(時中)’이라는 말을 들어봤나? 언제부터인가 내가 삶의 화두로 들고 다니는 말이지. 때와 장소가 빚어내는 변화와 관계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도록 늘 그 균형을 잡으라는 얘기 말일세.”
“시중이라는 말, 현재 제가 고민하는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총지배인의 방침과 부지배인의 노선 사이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을 것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그게 제 고민의 핵심인 셈이지요.”?????

“두 분이 만나면 언제나 이렇다니까. 잘 나가다가 꼭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로 빠지신다니까요.” 무숙자가 자기는 술이나 더 마셔야겠다며 일어섰다.?????
“여행사를 떠나 컨설턴트 일을 시작할 때 나는 그 일을 잘해낼 수 있다고 자부했지. 그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많은 경험과 아이디어가 있었으니까.”
“덕분에 저도 대표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운이 따랐는지 운을 따랐는지 모르지만 다행히 지금까지는 잘 해오고 있네. 문제는 앞으로일세. 나는 지금 업계의 ‘중심’에 와있네. 전에는 내가 상황을 쫓아가기 바빴는데 내가 중심이 되고부터는 상황이 나에게 끌려오지.”
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 대표를 바라보았다.

“하하, 내 말을 오해 하지는 말게. 내가 업계를 좌우하는 그런 이너 서클의 구성원이라거나 그런 힘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야. 내가 하는 일의 중심을 파악했다는 정도로 이해해주게. 그런데 정말 어려운 문제는 중심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야. 자신이 중심에 섰다고 생각하면 주변의 관계를 돌아보는 데 소홀해지고 균형을 잡는데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잖아.”
“조금 알 것도 같은데요.”
어느 새 자리에 돌아 온 무숙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대표님, 제가 고민하는 문제는 도대체 어디가 중심이냐 하는 겁니다. 양쪽에 서로 다른 입장이 있다면 그 중간쯤 어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는 그런 의미에서 산술적인 중간 지점이나 평균점은 진짜 중심이 아닌 것 같아요.”??

“자네 생각에 동의하네. 사실 그런 중간 지점에서 해답을 찾으려 들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식의 기회주의가 되거나 이도 저도 아니라는 회색분자가 되기 십상이지. 무엇보다도 그런 자세로는 자기중심 하나도 잡기 힘들지.”??????

“솔직히 현실에서는 저도 그런 처신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에서는 마음에 드는 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기준이 자못 진지하게 논의를 이어갔다.

“그래서 그 때는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보는 기회가 필요하더군. 차원을 바꿔보는 것이지. 생각의 차원도 좋고 행동의 차원도 좋고, 현재의 자리에서 벗어나 차원을 이동해 보는 것이지. 그게 아마도 자네가 말하는 변화 속에서 예측하고 관계 속에서 조망한다는 것의 의미와도 연결되고, 내가 말하는 시중에도 부합하지 않을까.”

박 대표는 기준이 원하는 정답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그 답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조언하고 있을 뿐이다. 기준의 머릿속은 여전히 안개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엉킨 실타래에서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총지배인과 강 전무의 노선 사이에서 지금 나의 입장은? 강 전무의 방침과 변형섭의 새로운 프로그램 사이에서 나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안젤라가 추구하는 일과 내가 하는 일은 어떤 관계인가.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삶의 지향점은? 리조트가 가야 할 길은? 아, 루앙이라는 사람은 또 어떻게 설정을 해야 하는가.

박 대표의 말대로 예측하고 조망하는 일은, 중심을 잡고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엄청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평면이라는 2차원의 세계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3차원의 입체를 깨닫는 것만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지난한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기둥으로 받쳐져서 위태로운 건물에 또 하나의 기둥을 세워서 제대로 균형을 잡는 것처럼 반드시 성취해야만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박 대표가 말을 덧붙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곳 역시 세계적인 불황에서 비켜갈 수 없을 게야. 오픈은 했지만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을 걸세. 이 리조트가 그 숱한 파도들을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나? 자네의 시각을 좀 더 확대할 필요가 있어. 어쩌면 리조트가 아니라 리조트를 둘러싼 여러 환경까지 두루 봐야할 걸세.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일의 중심과 균형점을 찾아보게.”

무숙자의 방해로 두 사람은 더 이상 논의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세 사람은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과 새벽의 시원한 바람을 벗하며 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로 진지하게, 때로 농담과 웃음을 주고받으며 그들은 즐겁게 취해갔다. 저 멀리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쉬움을 남긴 채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기준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한 마디를 수첩에 꼭꼭 적어두었다.

‘시중 – 관계 속에서 일의 중심을 찾고 균형을 잡아라.’
숙소로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꽃향기가 느껴졌다. 불을 켜자 침대 위에 한 다발의 꽃과 한 병의 와인, 그리고 쪽지가 눈에 띄었다.

‘안젤라가 다녀갔구나!’
기준은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쪽지를 펼쳤다. 리조트 오픈을 축하한다는 인사와 총지배인이 제대로 된 검진을 받기로 했다는 것과 이제 다시 오지마을로 돌아간다는 내용이 정갈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기준의 시선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구절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 정이 깊으면 짐이 될 수도 있겠죠. 당신 어깨에서 짐 하나 더는 마음으로 잠시 떠납니다.

기준은 그녀가 놓고 간 꽃다발과 와인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짐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화가 났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벌렁 드러누워 거친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이다. 오래전 어디선가 읽었던 한 구절이 불현 듯 머리를 스친다. 잠시 후 머리가 맑아오기 시작했다. ‘안젤라, 당신은 내게 짐이 아니라 힘이야.’ 그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제 구체적인 행보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었다. 날이 밝았을 때 기준은 이미 찬물에 샤워를 끝낸 뒤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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