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4회
“어제 오기로 하지 않았나?”
인사가 끝나자마자 총지배인이 대뜸 물었다.
“빗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기준은 논두렁에 빠진 채 차안에서 잠을 자야 했던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려 했다.
“아무튼 자네는 어제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말이야.”
기준은 총지배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둥글둥글한 얼굴은 친근한 느낌을 주었지만 오랫동안 현장을 지휘해본 사람답게 은근히 위압적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나저나 도착하자마자 일이 터졌군. 레스토랑 말일세. 잘해낼 수 있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보수공사 말일세. 시설부 매니저가 관리해야지.”
“시설부 매니저…, 제가요?”
총지배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여긴 지금 전쟁터야. 친절한 설명 따윈 기대하지 말게. 가서 짐부터 풀고 현장 상황 파악하도록.”
그리고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버렸다.
다소 불쾌한 심정으로 뒤돌아서던 기준은 보조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액자를 보았다. 긴 머리에 활짝 웃고 있는 젊은 여자의 사진이었다. 그는 멈칫했다.
‘많이 닮았네.’
눈을 가늘게 뜨고 좀 더 자세히 보는 순간 온몸이 찌릿해졌다. 사진 속 그녀는 분명 안젤라였다.
“거기서 뭐 하나?”
등 뒤로 총지배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기준은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안젤라 사진이 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답답하고 혼란스러웠다. 평상심을 되찾기 위해 그는 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쁜 사람과 느긋한 사람이 뒤섞여 있고, 모두가 서로에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땡볕 아래 쉬지 않고 전기톱을 든 채 땀을 뻘뻘 흘리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그 옆에서 줄곧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기 차례만 기다리는 이도 있었다.
다시 공사장 한 귀퉁이로 눈길을 돌렸을 때 기준의 눈이 커졌다. 아침에 코끼리와 함께 사라졌던 백발 사내가 방갈로 지붕에 올라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준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일하는 분이셨군요.”
아는 척을 하자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지붕에서 내려왔다.
“아침엔 고마웠습니다. 그나저나 그 코끼린 뭐죠?”
“여기서 키우는 녀석인데, 일종의 마스코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내는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루앙이라고 합니다. 방갈로 공사를 맡고 있지요.”
“저는 본사에서 온 김기준입니다.”
그러자 루앙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아, 서번트투어! 캡틴 김기준 씨로군요?
기준은 놀랐다.
“서번트투어를 어떻게?”
자신이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안젤라한테서 귀가 닳도록 들었지요.”
기준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안젤라를 아십니까? 지금 어디 있습니까?”
루앙은 기준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안젤라는 저에게 아주 중요한 동료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그녀는 이곳으로부터 세 시간 거리에 위치한 산간 오지에 머물고 있었다. 라오스의 고도인 루앙프라방과 왕위앙의 중간지점인 그곳에 이름 없는 마을이 생겨나고 있는데, 안젤라가 그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준은 그동안 안젤라의 전화가 먹통이었던 이유를 알게 되어 안심이 되었지만, 그녀가 한 마디 언질도 없이 그런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못내 서운했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계획은 원대한 편입니다. 그곳에 지역 의료 활동을 지원하는 일종의 교육장까지 만든다는 계획이지요.”
루앙이 설명했다.
“그런데 안젤라하고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처음 그 오지에 집을 짓기 시작한 게 접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안젤라가 찾아와 일을 돕겠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협력관계가 이루어진 겁니다.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된 것도 안젤라 덕이지요. 집 짓는 기술이 필요했는데 잘 됐지요.”
“안젤라 덕이란 건 무슨 뜻인가요?”
“아시잖습니까. 총지배인이 안젤라의 외숙부니까….”
기준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한 표정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