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17회

② 라오 프로그램

“총지배인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따가운 햇볕이 비껴간 오후, 방갈로 공사장에서 기준은 모처럼 총지배인과 마주할 기회가 생겼다.

“건강? 허허.”

총지배인은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마치 그날 있었던 일을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리라는 듯 기준을 외면했지만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는 지금도 틈만 나면 원주민마을의 비밀 숙소에서 지내고 있을 터, 속 깊은 이야기 나눌 대상 하나 없이 뿌연 황토색 쏭강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지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좀 어떤가, 그쪽은?”

강 전무 부임 이후의 호텔 상황을 ‘그쪽’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말투도 씁쓸하기만 했다. 총지배인은 호텔 업무에서 거의 손을 떼다시피 한 뒤 상대적으로 방갈로나 수영장 등 리조트 부대시설 공사 현장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호텔건설이 아닌 호텔경영을 위해서는 개척자나 지배자 스타일의 총지배인보다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편인 강 전무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아직까지는 별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사실 총지배인이 호텔 쪽의 진행 상황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빠진 뒤의 업무 공백은 없는지 직원들이 동요하지나 않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총지배인의 공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호텔은 나름 일사분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전체 리조트야. 그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하네. 호텔 준비가 잘 돼가고 있다니 좋은 일이네만 향후 리조트가 전체적으로 완공되고 나면 그때는 상황이 또 달라질 걸세.”

“무슨 말씀이신지.”

“자칫하다간 리조트와 호텔이 별개의 조직처럼 따로따로 놀게 될 수도 있어. 자네한테 호텔뿐만 아니라 리조트 전체를 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아, 알겠습니다.”

그러나 기준은 지나친 우려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보다는 리조트 전체를 관할하는 책임은 엄연히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못박아두려는 것으로 들렸다.

총지배인은 벤치에서 일어나 공사장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딘지 힘이 없고 무거워 보였다.

총지배인과 헤어진 뒤 기준은 오랜만에 본사의 무숙자에게 전화를 걸어 한약 몇 첩을 부탁했다. 그러자 무숙자가 대뜸 걱정부터 하고 나섰다.????

“형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먹을 게 아니야. 그리고 보약도 아니고.” 기준은 환자가 총지배인이라고 밝힐 수는 없었다.?

기준은 안젤라에게 들은 내용과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토대로 총지배인의 증상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무래도 뭔가 느낌이 불안한데요?”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고. 거기는 어떤가?”??????

본사의 상황을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전세계적 금융 위기와 경기 침체는 국내 건설업계를 초토화시켰고 여행 업계 역시 유탄을 맞은 만큼 하루하루 산을 넘듯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준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무숙자, 우리가 함께 씨를 뿌려 놓은 서번트 투어가 이제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서 공정 여행이나 착한 여행으로 확산되고 있잖아. 희망을 버리지 말자.”????

“라오스도 이제 곧 성수기가 되겠네요. 저는 형이 라오스에서도 서번트 투어같은 멋진 성공작을 만들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기준의 궁색한 말에도 무숙자는 진심을 담아 용기를 주었다. 멀리 있지만 무숙자는 여전한 기준의 지지자였다.?

우기가 끝나고 바야흐로 성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라오스의 주요 관광지인 루앙프라방은 거의 모든 리조트와 호텔, 게스트하우스 등이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 또한 유럽과 미주에서 온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환각 음료 파티가 벌어져 마약 관광이라는 오명이 불거진 왕위앙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곡을 끼고 있는 유원지 주변에서는 밤이 되면 자양강장제에 아편 성분까지 섞인 술이 공공연하게 팔리고 있지만 관광 수입을 무시할 수 없는 시 정부는 단속 시늉만 할 뿐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관광객의 상당수가 한 달 이상씩 머무는 장기투숙객들이다보니 시즌을 앞두고 급조된 숙소들까지 난립하고 있었다.??

한동안 컴퓨터 앞에만 앉아 두문불출하던 변형섭 차장이 ‘라오 프로그램’을 완성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강 전무는 모니터 앞에 앉아 손뼉을 쳤다.

“좋아, 아주 좋아! 기대 이상이야.”

D-30일 째 되는 날, 경쟁업체인 무사오 리조트가 리모델링을 끝내고 드디어 영업을 시작했다. 강 전무는 변형섭과 예약부서 직원들을 따로 불러 본격적인 예약 업무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리조트 오픈 이후 성수기 동안 ‘풀하우스’가 그의 목표였다.?

개관 준비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강 전무는 일정 엄수를 강조하며 호텔 개관을 위해 직원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개관 날짜가 한 달 이내로 좁혀지면서 부서장들은 실제 상황과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느꼈다. 직원들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은 이미 끝난 상태이고, 각종 비품과 용품 등 준비해야 할 요소들도 거의 갖춘 상태였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강 전무의 눈에는 아직 부족한 게 많았다. 각 부서별로 라오 프로그램을 실행하면서 업무 성과가 수치화되기 시작하자 그는 매일같이 부서장들을 불러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것은 마감시간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임무를 놓고 하루가 주어질 때와 사흘이 주어질 때 과연 어느 쪽이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사흘이 주어진 팀은 이틀을 허비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일에 뛰어들곤 한다. 그러나 이틀을 허비했다는 스트레스까지 겹쳐서 십중팔구는 일을 완수하지 못한다. 하지만 단지 하루가 주어진 팀은 오히려 24시간을 온전히 일에 쏟아 붓게 될 것이고 그러한 집중력이 곧 임무 완수로 이어진다. 군더더기 없는 행동과 화살 같은 집중력! 그것은 바로 마감시한에서 비롯된다. 오늘부터 각 부서의 단계별 업무 마감 기간을 반드시 엄수하도록!”

거의 모든 부서들이 더욱 촉박한 계획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일정이 앞당겨지기는 바람에 밤잠을 설치는 직원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

격무가 이어지던 금요일 늦은 오후, 기준은 루앙을 찾았다. 그는 주말이면 항상 그렇듯이 안젤라의 오지마을로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기준이 자동차 열쇠를 내밀었다.

“괜찮으시면 제 차를 이용하십시오. 어차피 이번 주말에도 현장을 벗어날 일이 없으니까.”

“나는 여기 낡은 오토바이가 더 편합니다.”

“사실은 마을에 보낼 짐이 좀 있어서 그럽니다.”

|기준은 차에 실어둔 두 개의 박스를 가리켰다. 아스피린과 해열 진통제 등 간단한 구급약들과 비누, 치약, 칫솔 등 생필품들, 그리고 진공포장 된 간식 등 이른바 ‘김기준표’ 구호물품들이었다. 무숙자가 한국에서 정성스레 보내 온 것들이었다.

안젤라가 정말 기뻐하겠군요. 허허.”

“마을 상황은 어떻습니까? 좀 진척이 있나요?”

“지난주에 물길을 끌어오는데 성공했고, 다음 달이면 태양전지 시설을 좀 더 늘릴 겁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요. 코끼리 걸음처럼.”

“그래요? 그러면 주민들도 좀 늘었겠습니다.” 기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이미 새 식구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건 미래에 닥칠 일들을 예측해두는 건 기본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리조트의 미래도 예측해보셨습니까?”??

“리조트에 대한 예측이라면 김차장님이 더 잘 하실 것 같은데요.” 루앙이 웃었다. 기준은 좀 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부지배인이 부임한 뒤로 많은 변화가 생겼잖습니까?”

루앙의 생각이 정말 궁금했다. 리조트 현장에서 루앙은 기준이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몇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게다가 그는 사물에 대해 관찰하고 생각하는 점에서 남다른 점이 있었다. 그동안? 그와 바둑도 몇 차례 두어봤지만 정석에서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바둑을 두곤 했다. 그 스타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은 루앙이 터놓은 길 위에 바둑알을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곤 했다. ‘고수시군요.’ 기준이 추켜세우면 그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고수는 자신의 길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직 멀었지요.’

기준의 차에 짐을 옮겨 실으며 루앙이 입을 열었다.??

“크든 작든 어떤 일을 이룩하려면 통찰의 힘이 필요하지요. 예측은 통찰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단계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그런데 예측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부분 신뢰성 있는 데이터들을 가능한 한 많이 수집해서 그것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는 데 아주 익숙하지요. 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게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처음 그 오지에 집을 짓기 시작할 때 몇 명 안 되는 제 동료들 중 누구도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꿈도 꾸지 못했지요. 다섯 명이 모여 어떻게 마을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 우린 모두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망치를 들고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명의 힘이 합쳐지면서 열 명의 에너지가 생기더군요. 무력감이 자신감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파워가 발생한 겁니다. 통나무집 하나를 완성했을 때 누군가 말했습니다. ‘우리 마을을 건설해보는 게 어때?’ 하고 말입니다.”

루앙은 어둑해지는 리조트 현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미래를 예측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바로 지금, 현재에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는 현재의 생각과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내가 지닌 가치관과 현재의 내가 지닌 가치관이 같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우울증 환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불행하기 때문에 미래 역시 행복해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곤 합니다. 운동을 통해서 몸 안에 새로운 활력소가 생긴다는 사실을 모르지요. 다시 말해서 상황이 변하면 자신도 함께 변화한다는 사실을 놓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잊은 상태에서는 예측이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화 속에서 예측하라, 이 말이군요.”

루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로 주고받는 바둑은 이번에도 루앙의 승리였다.

One Response to [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17회

  1. 염기탁 December 13, 2012 at 11:50 am

    박현찬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다음에서 라사모(라오스를좋아사람들모임 )카페를운영하는카페지기.염기탁입니다.
    저희카페회원의추천으로선생님의 라오스연재소설을집하게되어독자가되었고.
    선생님의연재소설을 ?라사모?카페에도올렸으며하고
    이렇게연락합니다.허락을구합니다.
    라사모.카페지기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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