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8회

③오래된 꿈

루앙이 표시해 놓은 산간마을은 대략 위앙깜과 남밍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공식 지도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국도에서 갈라진 오르막 샛길로 이십 여 분을 들어가자 지척에서 개 짖는 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이런 곳에 마을이?’
숲속에 마을이 있었다. 아니,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쥬로우(竹樓)라 불리는 기둥 위의 전통가옥들이 숲길을 따라 나란히 서 있고, 그 아래 웃통을 벗은 사내들이 집에 올릴 대나무를 다듬거나 공터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남아 지역의 고산마을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곳 역시 겉으로 보이는 외관은 어설프고 세간은 가난하며 사람들의 움직임은 나른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마른 땅 위로 황토색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데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담 안에는 순한 눈을 가진 소 한 마리가 입을 우물거리고 있고 길가 흙탕물에서는 아이들이 흙장난을 치고 있었다. 한 소년이 마을 어귀의 나무 위에 올라가 열매를 떨어뜨리자 조무래기들이 깔깔거리며 모여들었다. 곧 이어 땅 위에 떨어진 열매 하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런 광경은 마치 빛바랜 흑백 사진 속의 육십 년대 한국 농촌을 옮겨놓은 듯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감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촌락 안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가던 기준은 발을 멈추고 말았다. 임시로 거주하는 난민 부락도 아닐텐데 주민들의 살림살이는 지나치게 허름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홀쭉한 배에 갈비뼈를 드러낸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그늘 아래에서 잠들어 있었고, 맨발의 아낙들은 갓난아기를 안은 채 표정 없는 눈으로 기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안젤라가?’
언제나 오지마을만을 찾아다니는 안젤라였지만 이곳은 예상보다 훨씬 열악한 수준이었다.
“안젤라는 여기 없어요. 저 쪽으로 가보세요.” 해먹에 누워 낯선 이방인을 주시하던 한 아이가 개울 건너 숲 쪽 방향을 가리켰다.

마을을 가로 지르는 개울에는 제법 수량이 많았는데 크고 작은 여자 아이들이 발가벗은 채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작은 다리를 건너 얼마 쯤 숲 속으로 들어가자 저만치 대나무로 지은 작은 건물들이 보였다. 기준은 급한 마음에 한달음으로 달려갔다. 외양으로 보아 야외 진료소가 틀림없었다. 안젤라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기준의 눈에 전혀 예상치 못한, 그러나 낯익은 팻말이 하나 들어왔다.
‘Circle of Life.’? ‘서클 어브 라이프’라는 이름은 기준이 심혈을 기울였던, 이제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여행 상품의 정식 명칭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실패한 프로젝트의 이름, 기준 스스로도 놓아버린 그 이름. 그런데 안젤라는 그 이름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료소 뒤편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가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뭔가를 짓고 있었다. 널려있는 대나무며 통나무의 규모를 보니 단체 숙소를 만드는 것 같았지만 전문적인 솜씨는 아니었다. 질서 없이 얼키설키 달라붙어 땀 흘리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얼마 뒤, 기준은 팔을 걷어붙인 채 공사장 한 복판에 서있었다. 청년들에게 짧은 라오스 말로 지시를 하며 공사를 돕는 동안 기준은 어느새 그곳 사람들의 일원으로 변해갔다. 기준에게 있어 건물을 짓는다는 행위, 아무 것도 없던 공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든다는 것은 언제나 본능적인 욕망을 자극했다. 게다가 이곳은 안젤라의 마을이 아닌가. 기준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었다.
온몸에 진흙과 모래를 묻혀가며 일하던 기준은 갑자기 멈칫했다. 누군가 기준의 등 바로 뒤에 서있었던 것이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안젤라였다.
반쪽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자 반가움보다는 가슴이 먼저 저려왔다. 그녀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는 여전했지만 눈에 띄게 야윈 몸집이 이곳 생활의 어려움을 짐작하게 했다.?

대나무 오두막에서 안젤라는 기준을 위해 밥을 안치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가운 대신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다소 들떠 있었고 말도 그만큼 많았다. 그러나 기준은 그런 안젤라의 모습이 왠지 안쓰러웠다.
“총지배인님이 외숙부라는 거,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어요?”
“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말할 기회를 놓쳤어요.”
안젤라가 식탁에 찌개를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외숙부하고는 소원한 편이예요.”
기준이 더 궁금한 기색을 보이자 “설명하려면 길어요. 차차 알게 될 거예요.”라며 답을 피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요.”????
“내 상관이 당신 외숙부인데 중요하지 않다니 조금 섭섭한데.”
“그래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찌개가 맛있는가 하는 거죠.”
찌개의 맛은 변하지 않았다. 안젤라 특유의 매콤하고도 시원한 국물 맛이 그대로였다.
기준이 자꾸 총지배인의 이야기를 꺼내자, ‘저를 만나러 온 건가요, 아니면 총지배인의 조카를 만나러 온 건가요’ 라며 기준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식사를 마치자 어느새 주위에 어둠이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대나무로 엮은 발코니에 나서자 남국의 풀벌레 소리가 바람에 실려 주위로 퍼져 나갔다. 안젤라가 찻물을 끓이는 사이 기준은 어스름 윤곽을 잡아가는 숲을 망연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루앙이 기준씨를 구해주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에요?”
안젤라의 맑은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날 구해주었다고 그래요? 도움을 조금 받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찻잔을 받아들며 기준이 대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준씨 차를 꺼내주었다고 했어요. 그것도 자기가 아니고 코끼리가 말이죠.”
안젤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루앙이라는 사람과는 잘 아는 사인가요?”????
“음, 자세히는 몰라요. 승려 출신으로 영국에서 공부하고 배도 타보고. 뭐랄까, 좀 신비롭다고 할까요? 기준 씨하고는 잘 통할 것 같기도 한데, 어떻던가요?”
“글쎄……, 시설부를 맡게 됐으니 앞으로 자주 마주치겠지요.”
“그 시설부 매니저라는 일, 그렇게 내키지 않아요?”
안제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키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험이 많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중요한 업무라는 거지요. 제대로 돌아가는 조직이라면 나 같은 아마추어한테 쉽사리 책임을 맡기지 않을 겁니다.”
기준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에서 그런 결정을 했다면 뭔가 근거가 있지 않았을까요? 기준씨가 알지 못하는 기준씨의 능력을 알아보는 안목 같은 것 말이죠.”
“나 지금 농담하는 것 아닙니다. 심각하다고.” 기준이 안젤라를 똑 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저도 농담 아니예요. 그럼 진지하게 물어볼게요.” 안젤라도 정색을 했다.
“기준씨,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건축에 관한 일이잖아요.” 안젤라는 건축에 대한 기준의 애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좀 두려습니다, 리조트 일. 그게 꼭 생소한 일이라서만은 아니고요.”
“태국의 남켐 마을에서 기준씨가 처음으로 병실 지어줄 때 기억나요.”
안젤라가 숲 아래 단체 숙소 터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여기서도 그랬고 기준씨는 항상 그렇죠.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없었죠? 일이 잘못 되어가는 걸 도저히 방관할 수 없었잖아요. 그게 기준 씨예요.”
“그게 벌써 삼 년 전이군요. 남켐 마을에서 안젤라를 처음 만났던 그 날이 아련하게 느껴집니다.”
숲 속의 어둑한 기운은 어느새 두 사람 앞 까지 다가와 있었다.??
“일이란 건 경험이 있는 사람보다는 의욕 있는 사람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기준 씨 꿈에 더 가까이 온 것 같기도 하고.”
“꿈?”
“기준 씨의 오랜 꿈.”
기준은 안젤라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에 비친 한 남자의 모습이 이상스레 낯설어 보였다.?
여행 상품 기획자가 된 뒤에도 그의 업무는 유난히 집을 짓고 건물을 올리는 일과 연관이 되곤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리조트 회사의 시설부 매니저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냥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안젤라의 생각은 달랐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요? 혹시 기준 씨의 잠재된 열망이 여기까지 길안내를 한 건 아닐까요?”
기준은 고개를 들어 숲 속에 잠긴 마을을 둘러보았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숲의 어둠, 그 어둠 넘어 작은 불빛들이 반딧불처럼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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