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14회

“환자들. 어디 있죠?”
루앙과 함께 건물로 들어서던 안젤라가 기준과 마주쳤다. 그녀는 일행이 눈치 채지 못하게 기준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기준은 직원들이 쉬고 있는 임시 병실로 안젤라를 안내했고 그녀는 곧바로 진료를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환자들은 흰 가운을 입은 안젤라의 손길이 닿자 하나 둘 평온을 찾아갔다.?
그때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다.
총지배인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환자와 다름없던 사람이 멀쩡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젤라는 총지배인을 흘깃 돌아보더니 진료를 계속해나갔다. 기준은 총지배인과 안젤라를 번갈아보며 숨을 죽였다.????
응급처치를 마친 안젤라가 한 숨 돌리자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던 총지배인이 말을 건넸다.
“네가 와 있어 주면 고맙겠구나.” 그 말은 정작 기준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안젤라의 반응을 주시했다.????????
“의료팀은 어떻게 됐어요? 여태 기본적인 의료 장비도 제대로 갖춰놓지 않고 이게 뭐예요?”
안젤라가 총지배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먼저 필요한 의료시설을 갖추세요, 정식으로. 제가 할 일은 따로 있어요.”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총지배인은 안젤라의 손을 잡고는 사무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준은 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궁금증을 뒤로 한 채 기준은 밖으로 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코끼리 사육장으로 향했다.

루앙이 혼자서 널찍한 나무판을 앞에 끼고 앉아 있었다.
“바둑을 두시는군요.”
기준이 다가갔다. 나무판은 가로세로 선이 그어져 바둑판이 되고, 그 위에 검은 색, 흰 색으로 칠한 맥주병 뚜껑이 바둑알 노릇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바둑판을 보고 있으면 정리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바둑은 잘 모르지만 다음에 저에게도 한 수 부탁합니다.” 기준은 루앙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입니다.”
루앙이 흑 돌을 들어 백의 대칭 자리에 놓았다. “바둑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다. 바둑을 두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네? 아하 그렇지요.” 기준이 어색한 미소를 풀며 웃었다.
“바둑에서 좋은 수는 어떤 수일까요?” 루앙이 백 돌을 든 채 물었다.
“게임에서 이기는 수가 좋은 수 아닌가요?”
“바둑을 두다 보면 좋은 수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데, 이기려는 욕심에서 두는 수가 꼭 좋은 수는 아닌 것 같아서요.”?
“하수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저 코끼리는 여기서 계속 키울 건가요?” 기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일종의 테스트를 하는 중입니다. 나중에 코끼리 트레킹 코스도 개발할 예정이라고 해서요.”
“지난번에 코끼리가 길을 찾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했죠. 그 이야기를 들려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기준이 코끼리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그게 저의 고민이거든요. 길에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은 무엇일까? 코끼리는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길의 마음이라, 길에도 마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습니다.”
“목적지를 가기 위한 수단이고 도구라고만 생각하면 길은 짧을수록 빠를수록 좋은 길이 됩니다. 하지만 그런 길에서는 마음을 잃게 됩니다.”?????
“마치 누구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글쎄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죠. 그건 그렇고, 새로 부임하신다는 강 전무라는 분은 차장님도 잘 아는 분이신가요?”
대화는 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개관 연장과 강 전무의 부임 등에 대해 주로 루앙이 물었는데 기준이 시원스레 대답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보니 얘기가 겉돌았다.
루앙은 바둑판을 밀쳐놓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불쑥 안젤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잘 아시겠지만 안젤라처럼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좀처럼 보기 드물지요.”
굳이 상대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이 루앙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나치게 단순하게도 보입니다. 해야 한다고 믿는 바를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기니까. 신념과 행동, 안젤라의 삶은 그 두 기둥으로 서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그런 단순함 속에서도 커다란 에너지가 나온다는 겁니다.”???
“지나치게 단순해서 오히려 무모해 지는 건 아닌가요? 원칙과 행동 두 기둥만으로 버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솔직히 저에게는 불안감이 더 큽니다.” 루앙의 단호한 말투 때문인가, 기준은 왠지 반발심이 일었다.?
“길 없는 곳으로 걸어 들어갈 때는 누구든 무모해 보이겠지요. 하지만 길은 그렇게 생겨납니다. 불안 속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바둑도 마찬가지, 불확실한 요소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어요? 사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런 것 아닌가요?”
“말씀 잘 하셨습니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매일 매일 부닥치는 문제들인데 어찌 그리 단순한 신념이나 원칙을 가지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무모하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저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기준이 루앙의 말을 피하지 않고 되받았다.
“차차 말씀드리지요. 당장은 납득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언젠가 서로의 노력들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가 무관하지 않다……. 좋은 말이기는 한데 감이 잡히지 않네요.”
더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루앙과 이런 식의 추상적인 논란을 벌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기준은 다시 화제를 돌렸다.?????
“미스터 루앙, 도대체 당신이 마을을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은 뭡니까?”

기준은 루앙과 헤어져 호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호텔 현관 앞에 총지배인과 안젤라의 모습이 보였다. 총지배인은 안젤라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총지배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안젤라가 기준 쪽으로 다가왔다.
“기준 씨, 그새 많이 야위었네요.”
“누가 할 소리.”
두 사람은 나무 데크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어 연못가 옆 그늘진 정자에 앉았다.?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개관이 연기돼서?”
“아니, 안젤라가 총지배인님의 부탁에 승낙을 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하하 기준씨도 참 순진하네. 어쩌면 두 사람이 그리 똑 같아요?”????
“내가 총지배인님과 똑 같다니 더 우울해지네. 대체 총지배인님은 어떤 분이시지?”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녀가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외로운 분이에요. 가까운 혈육이라곤 나 하나뿐이죠.”
짤막한 한 마디였지만 외숙부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표현하기엔 충분했다. 기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외삼촌은 이 리조트를 자기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세운 왕국이라고. 아니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하죠. 가족도 없으니 일과 결혼을 한 셈이지요. 평생의 숙원 사업으로 생각하니까. 가엾은 지배자.”
안젤라의 어깨에 손을 얹자 어깨의 긴장이 그대로 느껴졌다. 기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 원주민 가옥에서 마주 했던 총지배인의 형형한 눈빛이 떠올랐다.
“참 이상하죠? 철거민들을 볼 때마다 이 리조트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리조트 걱정을 하고 있으니.”
“총지배인님의 건강 상태는 어떤지, 혹시 별 이상은 없나요?”?
“혈압이 높으시고 고지혈증이 있으세요. 나도 걱정이에요.”
“리조트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당신이 모두 관할해야 속이 편하시니 업무 부담이 너무 커요. 내가 능력이 된다면 정말 총지배인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을 텐데.”????
“삼촌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게 병의 원인이에요. 하지만 일을 대충 하시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말을 듣겠어요?”??????
기준은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고마워요. 외숙부 곁에 있어줘서.”?
“나는 다만 안젤라 곁에 있는 것뿐이야.”
안젤라가 기준의 손을 잡으며 얼굴을 붉혔다.
????????
날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어느새 돌아갈 채비를 마친 안젤라가 짐을 들고 나섰다. 기준은 안젤라가 길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서 있었다. 숙소로 향하는 기준의 발이 천근만근이었다.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일 게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루앙과 미처 마무리 하지 못했던 대화의 끈이 이어지고 있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두 기둥으로는 부족하다. 세 기둥이 되어야 안전하지 않은가? 안젤라에게 필요한 나머지 한 기둥은 무엇일까?’
?
걸음을 옮기며 그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갔다. 일이 닥칠 때마다 열심히 뛰었지만 그의 방식은 일차적이고 반사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내일이면 오늘과는 다른 문제가 있을 것이고, 다음날은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이다. 과거의 해답은 하나의 이정표 역할에 그칠 뿐이다. 정작 필요한 것은 문제 자체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다.

기준은 다시 출발점에 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관은 연기되었고 이제 리조트 오픈까지는 새로운 일이 들이닥칠 것이다. 당장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잘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원칙과 실천 그 사이에 필요한 하나의 기둥, 혹시 그것은 방법의 기둥이 아닐까. 결국 그 기둥을 세우는 일은 안젤라의 삶뿐만 아니라 여기 리조트가 가야할 길을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까지도.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기준은 여전히 길에 서있다. 그는 어둠에 잠긴 호텔 건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습한 바람이 훅 하고 얼굴을 덮었다. 시원한 기운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느닷없이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번트 투어를 시작하게 한 동료 제리가 생각났다. ‘그래, 자네는 오늘도 나를 내려다보고 있군.’ ‘원칙맨’이라는 별명을 기준에게 넘겨주고 저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친구. 언제부터인가 기준의 목에 항상 걸려있는 목걸이가 있다. 제리가 남겨준 유물인 원칙의 목걸이, 코끼리모양의 목걸이다. 기준은 새삼스레 목걸이를 가만히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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