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12회

이튿날, 드디어 본사의 임원들과 회장이 도착했다. 그들을 맞는 자리에서 기준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아니, 사장님!”
기준이 서번트 투어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동안 묵묵히 지지를 보내준 사장이었다. 또한 회사가 위기에 빠졌을 때 기준이 대대적인 기업봉사 활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행 지시를 내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종합 레저 회사로 자신의 여행사를 합병시키면서 개인 자산은 키웠으나 실권을 잃게 되었고 그 때문에 기존 사업을 맡았던 직원들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장이었다.???
“수고가 많군.”
사장은 기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오시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사장은 기존의 여행 사업에 치중하고 회장이 주력하는 해외 레저 사업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회사의 방침으로 알려졌었다. 아무튼 사장의 등장으로 기준은 더욱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예전에 자신을 지지해주던 사장까지 방문한 자리에서 행여 문제라도 발생한다면?
임원진이 호텔과 리조트 건축 현장을 둘러본 뒤 레스토랑에서 만찬이 시작되었다. 사전 점검은 전체적으로 사전에 예상했던 시나리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터라 총지배인도 한 시름 던 표정이었고 만찬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임원 중 한 사람만은 만찬을 마치자마자 혼자서 호텔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저 분은 누구지?”
기준이 변형섭에게 물었다.
“강 전무라고, 베테랑이야. 호텔 경력만 30년이라니까 아무래도 보는 눈이 다르겠지.”
기준뿐만 아니라 호텔 직원들은 모두 불안한 시선으로 강 전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까다로운 감독관처럼 벨맨에서부터 메이드, 웨이터 등 지나치는 직원들마다 일일이 불러 세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기준은 형섭과 함께 프런트를 지키기로 했다. 몇몇 주요부서의 직원들도 추가로 당직을 서기로 했다. 총지배인의 특별지시가 내려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바람에 리조트에는 왠지 모를 긴장이 감돌았다.

저녁 10시 무렵, 바에서 임원들 시중을 들고 있던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슨 일인가?”
“전등이 나갔어요!”
갑자기 조명이 꺼지는 바람에 느긋하게 칵테일을 마시던 임원들이 어둠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기준은 부리나케 방재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간부 직원은 분산되어 제각각 임원들 주변을 지키기에 바빴고, 특별 지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지 현지 직원들은 이미 퇴근한 뒤였다. 기준은 일단 비상 발전기를 돌리고 다시 로비로 달려갔다. 그때서야 직원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이론적인 교육은 받았지만 실무 경험이 없었던 까닭에 그들은 이 작은 소동에도 적잖이 당황해 하고 있었다. 눈길이 프런트로 향했을 때 기준은 불안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강 전무와 변차장이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불안한 느낌은 다음 날 아침에 실체를 드러냈다. 날이 밝자마자 강 전무는 변차장을 앞세운 채 본격적으로 호텔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변형섭의 태도였다. 그는 연회실부터 방송실, 레스토랑 주방까지 마치 강 전무에게 일부러 보여주기라도 하듯 열심히 브리핑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며칠 전 암암리에 ‘덮자’고 했던 모든 치부들이 강 전무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굳이 왜 저런 짓을!’
기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전 10시, 총지배인의 집무실에 회장과 임원들이 모두 모였다. 기준은 로비에 서서 회의가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임원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회장과 임원들이 모두 나왔지만 총지배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혼자 집무실 의자에 넋을 잃고 앉아있었다. 기준은 먼발치에서 총지배인의 얼굴을 보았다. 마치 불치병을 선고받은 듯 검게 굳은 표정이었다. 그저 충격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도 절망적인 얼굴에서 기준은 불길한 느낌마저 받았다. 그때였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아, 사장님!”
사장은 다소 피로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호텔 밖으로 나와 산책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 개관은 좀 더 미뤄야 할 걸세. 부대시설 공사가 끝나는 대로 리조트와 함께 동시 오픈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네.”
기준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아무래도 저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관이 연기된 건 시설 때문이 아니야.”
“예? 그게 아니면 무엇 때문에 …” 기준은 자기 말에 자신이 없었다.
“총체적으로 진단해서 내린 결정일세. 문제는 시설이 아니라 서비스 시스템이야. 건물은 완공되었지만 아직 투숙객을 받을 단계는 아니란 뜻이지. 그래서 총지배인에게만 모든 책임을 맡긴다는 것도 …” 순간 자기도 모르게 기준의 낯 색이 바뀌었다.
“어차피 자네도 곧 알게 될 일이니 말해두지. 강 전무의 보고에 의하면 문제가 꽤 많더군. 앞으로 지원 차원에서 강 전무라는 양반이 부지배인으로 오게 될 게야.”
가슴이 철렁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기준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배워가면서 차차 익숙해지도록 하게. 앞으로 자네 역할도 차차 넓혀가야 할 걸세. 먼저 자네의 가치를 높이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리조트의 가치를 높여보게.”
“제 역할을 넓힌다는 건…….”
“자넬 이곳으로 보내기로 한 게 누구 생각인 것 같나?”
기준은 대답 없이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날세.”
기준은 고개를 들고 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느 회사나 다 그렇지만 합병된 뒤부터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지. 변화 앞에서는 소신을 지키기 힘들 때가 많다네. 이 리조트는 두 회사의 특성이 만나는 접점인 만큼 변화의 핵이라고도 할 수 있어. 그래서 이곳으로 자네를 보낸 거야.”
사장은 멈춰 서서 기준을 마주보았다.
“서번트투어가 꾸준히 지속되길 원했지? 그럼 잘 생각해 보게. 좋은 프로젝트가 롱런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일세. 이런 상황에서 옳은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장에게서 예전에 서번트투어를 지지해줄 때의 그 단호함이 느껴졌다.?
“서번트투어는 이미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어쩔 수 없는 결정일세. 허나 아주 사라진 건 아니야. 다만 예전처럼 다시 가동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할 뿐이지. 어떻게 하면 그런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 쉽지 않더군. 자네가 그 방법을 찾아보지 않겠나? 그러자면 우선은 이 리조트가 성공적으로 돌아가야 할 게야. 일단 자신이 몸담은 곳의 가치를 높일 수 있어야 해.”
사장은 기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는 호텔 현관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기준은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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