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막사이사이 “공직자여, 사심을 버려라”
필리핀의 여름은 3월이면 시작된다고 한다. 1957년에도 3월 중순이 되자 어김없이 무더위가 찾아왔다. 하지만 3월 16일 토요일 새벽, 마닐라 한 복판을 흐르는 파시그(Pasig)강 북쪽 강변에 스페인 식민지 양식으로 우아하게 지어진 말라카낭 궁전(Malacanang Palace)의 침실은 왠지 서늘함이 감돌았다. 한기 때문이었을까, 언제나 오전 5시 30분쯤에 일어나던 라몬은 그날 아침에는 새벽 4시에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총을 쏘는 꿈을 꾸었어.’ 그의 손에는 어느새 호신용 권총이 들려있었다. 라몬이 항상 총을 휴대하는 것은 항일 게릴라 시절부터 만들어진 습관인데, 대통령 취임 직후 어느 날 밤 그의 침실에 보좌관이 무단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라몬은 재빨리 총을 겨누었고 난입자는 방을 착각해서 잘못 들어왔다며 사과하고 물러갔다. 그는 늘 암살에 대한 생각을 했다. ‘필리핀의 위대한 민족운동가 호세 리잘(Jos? Rizal)도 스페인의 저격병에 의해 암살당했지.’ 라몬은 침대에 누운 채 새벽의 악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옆에는 루즈 여사가 곤하게 자고 있었다. 그는 깨우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모두 죽게 된다.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야. 선한 양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노력, 그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막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윽고 말라카낭 궁의 침실 창 유리를 통해 아침 여명이 들어오자 우울한 생각들이 사라져 버렸다.
오후 1시, 마닐라 남쪽 니콜스 공군기지에서는 대통령 전용기가 남쪽의 비사얀 제도(Visayas)의 세부(Cebu)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주일 전에 대통령의 정적인 클라로 렉토 의원이 세부를 방문해서 라몬의 정책이 기회주의적이라며 신랄히 비난했다. 그래서 이 지방의 민간기관이 그에게 연설을 요청했을 때 흔쾌히 승낙했다. 여전히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는 다가오는 11월의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이제야말로 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원칙에 따라 강력하고도 분명하게 정책을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전용기는 예전에 미군 DC 47기였던 기종으로 뭉툭한 여송연 모양을 한 쌍발기였다. 엔진 점검을 모두 마치자 4개의 프로펠러가 돌며 시속 290킬로미터의 속도로 날기 시작했다. “전용기 이름이 왜 ‘마운트 피나투보(Mount Pinatubo)’인지 아시오? 삼발레스 산맥(Zambales Mountains)의 가장 높은 봉우리 이름을 딴 것이요. 게릴라 시절에 우리가 거기서 싸웠지요.” 2시간 후 전용기는 풀이 덮인 라후그 공항(Lahug Airport)에 미끄러져 내렸다. 공항 전체에는 대통령을 환영하는 인파로 붐볐다. 임시로 만든 플랫폼에는 이 지방의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만 톤의 밀이 미국에서 오고 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라몬이 모든 행사를 마치고 귀경 비행기를 탄 것은 일요일 새벽 한 시가 지나서였다. 그는 알루미늄 사다리 꼭대기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러분이 궁지에 처해있을 때,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를 드리며 아직도 여러분을 도와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람이 바로 막사이사이입니다.” 마지막 연설을 마치자, 건장한 체구에 전형적인 필리핀 사람 얼굴로 항상 미소를 짓던 대통령의 표정에도 피곤한 기색이 비쳤다. 몇 분 후 전용기는 활주로를 질주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1시 13분경 비행기는 짙은 구름 속의 달을 향해 요란하게 날아갔다. 멀리 북쪽으로 32마일 떨어진 곳에는 높은 산의 울창한 산등성이가 검은 지평선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있었다. 세부 섬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좁고 긴 섬이다. 조종사는 라후그 공항을 떠나 마닐라로 향할 때 해안에 대한 근접 비행과 평행 비행 과정을 거쳐서 마눙갈산 정상을 통과하는 데 충분한 고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데 1957년 3월 17일 일요일 새벽 ‘피나투보’는 산봉우리를 향해 직행으로 항로를 잡고 있었다. 이륙 10분 후 비행기는 관제탑과 교신을 했다. 그리고는 채 5분도 못되어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산등성이 밀림 속으로 추락했다. 단지 한 사람 필리핀 헤럴드 기자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탑승객 25명 전원이 이날 심야의 비극적인 추락 사고로 생명을 잃었다.
막사이사이는 대통령직을 포함하여 장관과 국회의원 등 고위 공직에 있었으면서도 가족이나 측근에게 어떠한 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았다. 도로나 다리, 건물 등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51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한 서거 후, 아내와 자식들에게 남겨진 유산은 생명 보험금 22만 페소와 게릴라 장교 시절의 밀린 봉급 1만여 페소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8만 6천 페소에 불과했다. 이는 대통령 연봉의 2년 치를 조금 넘는 수준으로 이렇다할만한 재산은 없었다. 게다가 유언도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래서일까, 필리핀 국민들은 막사이사이를 사랑하는 이유를 그가 ‘마배이트(mabait)’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은 필리핀 사람들이 흔히 쓰는 형용사로 겸손과 관용, 인간적 매력을 의미하는데 넓은 의미로 보면 선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막사이사이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재물을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이용하지 않았으며, 부정부패의 관행에 깊이 물들어있는 관료행정과 기득권층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세력의 교묘하면서도 적대적인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빈곤층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선한 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혼혈 백인 출신이 대부분인 기득권층의 자기중심주의에 대항하여, 인구의 92퍼센트를 차지하는 평범한 말레이족 국민들을 위한 공공성을 지키려고 무한히 노력한 선한 정치가 라몬 막사이사이. 그가 남긴 유언은 바로 공직의 조건, ‘사심을 버려 공공성을 살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1958년에는 그의 이러한 뜻을 기리기 위해 아시아 지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Magsaysay Award)’이 제정되었다. 필리핀 국민들은 그와 같은 대통령을 가졌다는 데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