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수운 최제우, “산 밖의 산 넘어야 비로소 길이…”
인적이 드문 깊은 산 속, 쫓기듯 달려가던 한 사내가 갑자기 털썩 주저앉더니 그대로 땅에 엎드려 흐느낀다. 한 동안 피를 토하듯 애끓는 통곡이 이어졌다. 한식경쯤 지났을까, 숲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이윽고 몸을 추스른 사내는 옹달샘에서 한 바가지 청수를 정성스럽게 모셨다. 그리고는 영남의 대구 쪽을 바라보며 큰 절을 한다. 때는 甲子年(1864년) 3월, 연초(양력)에 哲宗이 승하하고 12세 高宗이 등극하여 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던 바로 그 해다. 일본에서는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에 의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년)이 배태되고, 대륙에서는 아편전쟁(1840~2)에 이어 태평천국의 난(1851~64)이 벌어져 구체제에 조종이 울리면서 조선반도가 소속된 중화질서가 뿌리 채 흔들리던 시기다.
십여 일 전의 대구 감영(監營). 날이 저물자 희미한 등불이 소슬하니 옥 안을 비추는데, 멍석 깔린 안 쪽으로 봉두난발에 피고름이 어지러운 죄수 하나가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앉아있다. 매질과 고문에 성한 데라곤 찾을 수 없는 피폐해진 몸일지언정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무심하기가 그지없다. 음습한 구석에 한줄기 바람이 지나가더니, 옥바라지를 위해 머리를 산발한 채 누더기 옷에 굵은 새끼줄까지 허리에 두른 동학도인(東學道人)이 소찬을 들고 감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남자 앞에 공손히 밥상을 갖다 놓고 제자리에 엎드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에 의협하고 대방한 기질을 타고난 남자는 여전히 묵상에 빠져 있다. 심고(心告)의 무게를 짐작케 하듯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 맺혔다. 도인이 조급한 마음에 헛기침을 몇 차례 한다.
마침내 수운(水雲)이 감았던 눈을 떴다. 마주치는 두 눈, 짧은 순간 만감이 교차하는데 도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작년 12월 경주 용담(龍潭)에서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게 체포된 이후, 수운은 수개월 동안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해왔다. 마지막 심문에서는 다리뼈가 부러지는 모진 문초까지 당했다. 그런데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동자가 부리부리하고 광채가 여전해 그 형광이 엄습했던 것이다. 콧마루가 높고 눈은 맑아서 정기가 솟으니 그 눈을 바로 뜨면 금불이 이는 듯 마주 보기가 어려웠다. 수운이 천천히 밥숟갈을 들었다.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온 현풍(玄風) 곽덕원(郭德元)이 엎드린 채 소리를 죽여 말문을 열었다.
“피신하실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수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풍운대수는 인간의 근원적 개벽(開闢)에 달려있는 것이니, 마음을 조급하게 가지지 말고 수심정기(修心正氣)하라.”
잠시 후 조용히 상을 물리며 물었다.
“경상(海月 崔時亨의 원명)은 지금 성중에 있소?”
“이미 떠났습니다.”
“만일 잡히면 매우 위태로울 것이니, 번거롭게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내 뜻을 전해주시오.”
곽덕원의 집 사랑채에는 여러 사람이 긴장 된 분위기 속에 모여 있었다. 수제자로 지목되어 피신 중이던 최경상(崔慶翔)은 스승이 대구로 환송됐다는 소식을 듣고 옥바라지 비용을 모았고, 각지의 접주(接主)들이 뒷바라지를 위해 대구로 숨어들었다.
“큰 스승님(大先生主)께서 먼저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을 말씀하시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조급증을 염려하셨소. 봄소식을 고대하나 끝내 봄은 오지 않았네. 봄의 곡조가 없지 않으나 봄이 오지 아니하니 때가 아닌가보다. 이제 절기가 다다르니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오는구나.”
경상이 수운의 글을 들어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시 한 수를 따로 내려주시며 반드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큰 선생님이 지상에 남기는 마지막 시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곽덕원은 한자 한자 정성을 들여 획을 그어 나갔다. 학식이 높은 접주가 글을 모르는 해월을 위하여 글귀의 뜻을 알려주었다.
“등불이 물 위에 틈 없이 밝았다. 기둥은 죽어 말랐을지라도 오히려 힘은 남아돌아가네.”
등불 밑에 둘러앉은 모두의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저들은 우리 동학을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이름만 바꾼데 지나지 않다고 하면서, 정작 동경대전(東經大全)이나 용담유사(龍潭遺詞)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심문도 하지 않았소. 죄목을 억지로 만들어 씌우려 하지만 스승님의 가르침은 마른 기둥 같으니 그 힘은 오히려 더욱 강해질 것이외다.”
“그 밖에 다른 말씀은 없으셨소?”
“선생님(先生主)께 이 말씀을 꼭 전하라 하셨습니다.”
곽덕원이 경상을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옥에 갇힌 수운을 상기하듯 잠시 숨을 가다듬고는 다시 글귀를 적어 내려갔다.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나는 하늘님의 명을 순순히 받겠다.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수운의 죽음을 직감한 경상의 눈에 슬픔이 가득해졌다. 작년 추석, 용담으로 수운을 찾아갔던 기억이 어제같이 생생하다. 달빛이 밝게 마당을 비추고 바람이 나무 사이로 불어드는데 수운은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삼경에 이르자 수운은 좌우를 물리치고 경상을 불러 무릎을 단정히 하고 앞에 앉게 하였다. 수운은 붓을 들어 수명(受命)이라는 두 글자를 써주며 일렀다.
“후세에 난을 당한들 무엇을 걱정하랴. 신중하고 신중하라. 용담 물이 흘러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 되고 검악(劒岳)에 사람 있어 일편단심이로다.”
이날의 실오라기 같은 도의 전수는 30년 후에 동아시아를 흔드는 갑오민중항쟁으로 살아난다. 하지만 혁명은 결코 선악을 구분하는 폭력이나 정치적 투쟁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가치관이 근원적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겨우 한 가닥 길을 찾아 걷고 걸어서 험한 물을 건넜다. 산 밖에 다시 산이 나타나고 물 밖에 또 물을 만났다. 다행히 물 밖의 물을 건너고 간신히 산 밖의 산을 넘어서 바야흐로 넓은 들판에 이르자 비로소 큰 길이 있음을 깨달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