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사도 바울, 믿음과 행위의 이분법을 넘어

성전으로 향하는 언덕에는 올리브나무의 꽃이 만발했고, 밭에서는 보리 추수가 한창이었다. 도성에 들어서자 거리가 온통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며칠 사이에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었다. 상점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용품이 가득하고 곡식자루들이 문밖에까지 쌓여 있었다. 오순절을 맞은 예루살렘 거리는 원근 각지의 디아스포라에서 온 유대인들로 넘쳐났다.

“마지막으로 성전에 올라온 때가 언제였습니까?”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동행자에게 물었다. 매부리코에 눈이 움푹 들어간 작은 키의 중년 남자는 이마가 유난히 두드러진데다가 몸은 구부러진 지팡이처럼 여위었다. 바울(Paulus)이라 불리는 사울, 그가 고개를 들어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가득 받은 성전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군요.” 사도 바울(Apostolus Paulus)은 야고보가 묻는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2년 후,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를 당하던 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고백해도 되겠지요? 우리가 모두 예수의 율법 아래 있는 사도이니 말이죠.” 야고보가 곁으로 다가왔다. “성전에서 스데반과 논쟁이 있던 그날, 어떤 면에서 나는 당신에게 더욱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럴 리가요?” 바울은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예수의 혈육이신 야고보 형제가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지금의 시리아 길리기아 지방, 다소(Tarsus) 출신인 바울은 당대 최고 수준의 헬라학자 아테노도루스(Athenodorus)가 이끄는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아 논쟁과 수사에 능했고, 유대랍비 가말리엘에게 히브리 전통을 배워서 구약이나 예언서에도 정통했었다.

“당신의 논조는 침착하면서도 예리했습니다.” 야고보는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토라(Torah)의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나도 토라 아래 있는 자들처럼 되겠소.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종이 되기로 했기 때문이요. 하지만 야고보 형제여,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예수의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나도 스데반처럼 예수가 하나님의 메시아로 지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고 있었지요. 하지만 예수가 다윗 왕처럼 유대인이라는 사실, 메시아는 유대인을 통해서 로마와 아시아와 전 세계로 퍼져야 한다는 언약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야고보는 그런 점에서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파의 자손 사울에게 동족의식을 느꼈었다.

“예전의 사울은 구원의 은총이 유대인에게만 내린다고 생각했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하지만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뒤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異邦人)에게도 임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교회는 이방인에 대한 선교를 승인했고 당신을 사도로 임명했지요.”

예루살렘의 공기는 거룩한 축제 기간 동안에 가장 살벌해진다. 벨릭스 총독 휘하의 호민관은 유대인들의 폭동을 대비한다며 도성 곳곳에 로마 군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다.

“유대인은 율법의 행함을 요구하고, 이방인들은 세상의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에게는 불길한 일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유대의 율법도 이방인의 지혜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잠깐만요, 유대인의 율법 전통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군요. 우리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면 구원에 ‘머물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율법과 믿음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율법과 믿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바울은 히브리파와 헬라파로 갈려진 예수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아지기를 소망해온 꿈이 더욱 간절해졌다. “예수가 모두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제 한 몸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 분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임을 믿고 어떠한 차별이나 배제도 없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만을 고집하며 살라는 악마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고,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나누는 선함으로 악한 세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극복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곧 율법을 다 이룬 사람과 같습니다.”

이 만남이 있고나서 야고보는 4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위반했다는 구실로, 사도 바울은 8년 후에 로마에서 벌어진 네로의 기독교 박해로 인해 순교한다. 믿음과 율법의 갈등은 기독교 박해를 겪으며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신앙 아래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종교개혁 시기에 믿음과 행위가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강조된다. 그것은 교조적인 중세 가톨릭과 대결하던 마르틴 루터의 상황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믿음 우월주의는 현재까지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행위 없는 위선적인 믿음을 중시하는 믿음지상주의와 인간의 율법행위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지상주의는 모두 틀렸고, 그러한 극단적 주장들은 서로 대립적이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믿음 없는 행위’나 ‘행위 없는 믿음’에 맞서서 ‘믿음과 더불어 행동’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저 우리는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선해질 수 있는가? 만약에 우리가 그 대답으로 ‘율법이 아니라 믿음’ 혹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단순하게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믿음과 행위라는 선악 이분법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꼴이 된다. 믿음이든 행위든 그것이 기득권을 위한 자기중심논리가 되는 순간, 유대의 율법지상주의자들이 선민의식에 빠져 이방인을 무시했듯이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 유대기득권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박해했듯이 예수의 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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