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터키 계몽군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아시아엔=박현찬 칼럼니스트] 1922년 가을, 무스타파 케말은 사카리아(Sakarya) 전선의 임무를 완수하고 앙카라(Ankara)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앙카라, 척박한 구릉지대에 둘러싸인 오래 된 도시는 대로변의 가로수를 제외하면 수목이나 수풀이 흔치 않아 삭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앙카라 남동쪽을 바라보는 찬카야(Cankaya) 언덕은 달랐다. 작년 봄, 역장 관사에 머물던 무스타파 케말은 매혹적인 연인 피크리예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큰 정원과 분수, 거기에 멋진 테라스까지 갖추어진 2층 석조 건물을 보는 순간 케말 자신도 마음을 빼앗겨 영구히 거주할 집으로 결정했다. 주변이 과수원으로 둘러싸여 공기가 맑았고, 무엇보다 언덕 위에 있어 경관이 뛰어났으며 경호에도 도움이 되었다.
퇴각하던 그리스 군에 의해 도시 절반 이상이 불에 타버린 이즈미르(Izmir)에서 떠나 온 사령관 무스타파 케말은 이틀 후 의회에 출석했다. “우리는 끈질기게 저항하던 그리스 군에 최종적인 일격을 가했으며, 터키는 드디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카리아 전투는 케말에게 행운의 전환점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여 연합국에게 분할 점령당한 이후, 케말은 10여 년간의 피나는 투쟁을 통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점령군들을 몰아내고 터키 동부의 소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수복했다. 이미 입법과 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케말은 더욱 확고하게 투르크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앙카라 구시가지의 복잡함과는 달리 찬카야 언덕의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했다. 케말의 친구와 동지들이 차례로 언덕 아래로 옮겨오면서 이곳은 새로운 터키를 건설하려는 엘리트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이들은 저녁이면 함께 모여 라크를 마시며 정책 방향에 대해 열띤 논의를 펼치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마을에 있는 신학교를 나와 존경받는 종교인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아버지는 현대식 교육을 하는 명문학교 쉠시 에펜디에 가기를 원했어. 처음에는 마을 학교에 다니다가 결국은 아버지가 원하는 학교로 전학했지. 이슬람 사상을 지닌 보수층과 자유로운 서구적 사고를 지닌 진보층 간의 갈등은 우리 모두가 일생 동안 풀어야 할 과제일세.” 그들 사이에도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나 정치적 트릭은 있었지만 예리한 푸른 눈의 ‘케말 파샤(Pa?a)’(지도자 케말)에게 불충한 자는 없었다. 파샤는 소년기에는 ‘선택된 자’라는 뜻의 무스타파라는 이름으로, 이후에는 무스타파 케말로 불리었는데, 케말이라는 성은 군사예비학교 시절에 얻은 것이다.
“나는 과학이나 수학에 관심이 많았지. 나의 수학 실력은 수학 선생과 비슷할 정도였네. 나는 항상 수업 진도를 앞서 나갔거든.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선생님의 이름이 나와 같은 무스타파였어. 어느 날 그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더군. ‘네 이름이 내 이름과 똑같은 무스타파이다. 그러니 구별이 필요할 것 같다. 이제부터 너를 무스타파 케말로 부르도록 하겠다’고 말이야.” 케말이라는 성은 ‘완벽함’을 의미하는데다가 나믁 케말(Namik Kemal)이라는 애국 시인에게 헌정된 성이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이 시인을 결코 잊지 않았다.
1919년 겨울, 그는 소아시아 중부의 크르쉐히르(Kirsehir)라는 작은 도시에서 지역 관리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문명화를 위해서는 스스로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밖에는 케말의 연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열광적인 환영에 고무된 그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영감을 준 오스만 애국시인 나믁 케말의 유명한 2행시를 인용했다.
‘적들은 조국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어두운 운명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설 자 아무도 없단 말인가?’
무스타파 케말은 ‘또 한 명의 케말이 조국의 가슴에서 태어났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적들이 조국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해도, 한 사람은 어두운 운명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설 것이다.’
1923년 10월, 무스타파 케말이 술탄제를 폐지하고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무너진 제국을 일으켜 나라를 재건하고 서구의 여러 나라들처럼 문명국으로 만드는 데는 확고한 권력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으며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라에도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뛰어난 지휘관이자 예리한 정치인이었고, 현실주의적인 통치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사이자 계몽주의자였다.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프랑스와 같은 문명국가를 친구로 여기며 독립을 부러워합니다. 근대적인 정부란 서구화된 정부를 일컫습니다. 물론 이슬람에도 이성과 진보를 부정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하지만 터키를 만든 아시아 민족에는 비이성적 미신을 믿는 ‘무식하고 가엾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빛을 보지 못한다면 무너질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구해낼 것입니니다.” 무스타파 케말이 성장하던 19세기 말은 유럽문명의 제국들이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제국의 운영 원리는 종교가 아니라 합리주의였다. 합리주의는 인간이 이성을 지닌 창조물이라는 주장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물질적인 세계에 이성을 적용했을 때는 많은 이익이 돌아온 반면, 인간 세계에 적용했을 때는 그 결과가 일정하지 않았다. 계몽적인 기독교 합리주의자들에게 무슬림들은 이성적인 계몽주의를 거부하는 미신신봉자들로 여겨졌다. 프랑스혁명을 숭앙하고 유럽문명에 우호적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역시 같은 생각을 가졌다. 다만 그는 터키를 문명화시키기 위해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계몽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1934년, 무스타파 케말은 모든 국민이 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제규정을 발표하고 그해 11월 아타튀르크(Atat?rk)라는 성을 선택했다. 투르크인들의 아버지‘(Ata)’라는 뜻이었다. 전체 국민의 98%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케말 아타튀르크의 터키공화국은 줄곧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추구하고 서구화를 지향하는 세속주의(케말주의)를 유지해 왔다. 케말주의와 이슬람주의는 물밑에서 여전히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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