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9일] 케말 파샤의 터키혁명 성공

2007년 자이툰 파병 의무장교 자살

2007년 5월19일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 자이툰부대에서 오(당시 27세) 중위가 자이툰병원 의무대 이발소에서 K-2 소총을 자신에게 쏴 자살했다. 국방부 사고 조사단은 오 중위가 작성한 일기에서 군의관의 통제와 관련해 갈등하고 의정장교로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기록돼 있다면서 자살 정황이 뚜렷하다고 결론을 냈다. 다음은 자이툰 부대 파병 일지.

▲2004년 1월12일 창설기획단 소집

▲2004년 2월9일 ‘파병동의안’ 국회 통과

▲2004년 2월23일 사단 창설

▲2004년 5월23일 파병지 확정(아르빌)

▲2004년 7월17일 신천지 작전 개시-서희부대 주둔지 건설 위해 아르빌로 이동

▲2004년 7월20일 주둔지 공사 착수

▲2004년 8월3일 이라크 파병 개시(전세기 출발)

▲2004년 9월3일 파발마 작전 개시-본진 쿠르드 자치지역인 아르빌로 이동

▲2004년 10월1일 MNB-NW로부터 작전권 인수

▲2004년 11월25일 11여단 전개 개시

▲2004년 11월27일 자이툰 병원 개원

▲2005년 1월13일 부대 전개 완료

▲2005년 2월25일 사단개편(3656명→3112명), 사단 2진 부대교대 개시

▲2005년 8월16일 사단 3진 부대교대 개시

▲2006년 2월21일 사단 4진 부대교대 개시

▲2006년 8월18일 사단개편(3112명→2112명)

▲2006년 8월23일 사단 5진 부대교대 개시

▲2007년 3월1일 사단 6진 부대교대 개시

▲2007년 5월1일 사단개편(2112명→1090명)

▲2007년 5월19일 의무행정 장교 오모 중위 자이툰병원 의무대 이발소에서 자살

▲2007년 9월8일 사단 7진 부대교대 개시

▲2007년 12월29일 파병연장 동의안 국회 통과

▲2008년 3월21일 사단 8진 부대교대 개시

▲2008년 9월25일 마지막 부대원인 사단 9진 부대교대 개시

▲2008년 10월2일 자이툰 도서관 개관

▲2008년 10월30일 자이툰 병원 진료임무 완료, 현지인 8만8805명 진료

▲2008년 11월24일 장비 및 물자 철수 시작

▲2008년 12월1일 아르빌 현지 임무 종결식

▲2008년 12월19일 자이툰 부대 해단식(장소 국군체육부대)

2004년 중국 상하이 중의약대에 `허준 동상` 건립

2004년 5월19일 중국 상하이에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허준(許浚·1539∼1615) 선생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세계 최대 규모의 한의학 대학으로 거론되는 중국 상하이(上海) 중의약대는 이날 푸둥(浦東) 캠퍼스 교정 한복판에 외부에서 관람할 수 있는 200평 규모의 유리 건물인 ‘낙원(樂園)’을 짓고 그 안에 허준 선생 동상을 세웠다. 중국 땅에 한국인의 개인 동상과 기념관이 세워지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허준 선생의 동상은 실물보다 좀 큰 규모이며 앉은 상태에서 동의보감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허준 기념관’은 운동장 한쪽에 자리잡고 있어 오가는 학생들이 쉽게 볼 수 있다. 중국 학생들은 허준 선생과 동의보감의 존재를 통해 한국의 한의학 수준을 평가할 수 있게 됐다.

동상과 유리 건물의 건설비용은 허준 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하는 한국인 침구연구가 이병국(李炳國)씨가 부담했으며 이씨와 중의약대학 옌스윈(嚴世芸) 총장과의 인연이 동상 건립의 계기가 됐다.

 

2001년 동아시아 경기대회 `팡파르’

2001년 5월19일 오후 일본 오사카돔 경기장에서 제3회 동아시아경기대회가 화려한 개막식이 열렸다. ‘세계를 위한 희망의 미래’라는 슬로건 아래 ‘지구와 삶의 희망찬 조화’를 주제로 9일간의 열전에 들어간 것이다.

개최국 일본과, 중국, 한국 호주 등 10개국 2700여명의 선수단이 출전했다. 개막식에는 다카마도 왕자 부부의 입장에 이어 영문 알파벳과 동아시아대회협의회(EAGA) 가입 순서에 따른 참가국 선수단 입장, 대회 조직위원장 등의 환영사, 다카마도 왕자의 개회 선언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각국 선수단은 기수를 앞세운 뒤 전통 민속의상을 입은 선수나 임원 2명이 뒤를 따랐다.

꼭 한 달 전인 같은 해 4월19일 첫 불을 밝힌 뒤 수로와 육로를 통해 오사카돔까지 운반된 성화는 시드니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노무라 다다히로와 시드니 장애인올림픽 여자 마라톤 은메달리스트 하타나카 가즈를 거쳐 최종 봉송 주자인 시드니올림픽 여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다카하시 나오코에게 건네졌다. 다카하시가 레이저빔의 인도를 받으며 경기장을 한 바퀴 달린 후 곤돌라를 타고 메인 스테이지 위에 있는 성화대에 점화했다.

 

2000년 한국인 엄홍길 히말라야 칸첸중가 봉 등정 성공

2000년 5월19일 한국 산악인 엄홍길씨가 히말라야 칸첸중가(해발 8586m) 등정에 성공했다. 해발 8000m 지점의 빙벽에서 10시간 동안 로프에 매달린 채 사투를 벌였던 등정팀은 당초 세르파의 죽음 등으로 포기하려고 했다. 엄 대장은 결국 박무택 대원과 함께 재도전에 나서 칸첸중가 등반에 성공했다. 박무택 대원은 그러나 2004년 에베레스트 산에서 사망했다.

 

1988년 WSJ, 노드롭 스캔들 폭로

1988년 5월19일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판 록히드 사건’으로 불리우는 노드롭 로비사건을 폭로했다. 노드롭 사건은 미국의 노드롭 항공사가 최신예 전투기 F20을 한국에 팔기 위해 1984년에 박종규 전청와대 경호실장과 이민하씨에게 775만 달러의 로비자금을 전달했고 그 상당부분을 전두환 대통령이 받았다는 의혹이 일어 정치적 문제가 된 사건이다.

그후 5공비리 특별수사본부는 이 사건을 수사해 이민하씨가 노드롭사로부터 350만달러를 받아 유용한 사실을 확인하고 그를 구속했다. 그러나 F20의 시험비행 추락사고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박씨가 1985년 12월 사망, 나머지 돈의 행방과 사건의 진상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박 종규는 경호실장 시절 별명이 ‘피스톨 박’이었다. 툭하면 권총을 빼 들어서 붙여진 별명이다. 한 도지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불이 세게 나와 대통령이 흠칫 놀라자 도지사를 뒷방으로 불러 흠씬 두들겨 팼다는 일화도 있다.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던 날 객석을 향해 응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육여사 사망의 책임을 물어 그를 경호실장에서 낙마시킨다.

 

1919년 케말 파샤 터키 혁명 성공

1919년 5월19일 나중에 터키공화국의 국부(國父)로 통하는 케말 파샤(Kemal Pa?a)는 1차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과 서쪽의 그리스, 동쪽의 아르메니아 등이 자신의 이스탄불 정부를 위협하자 무능한 정부를 불신임하고 터키 혁명을 선언한다. 이날 북부 흑해 연안의 삼순에 도착해 자신을 제거하려고 하는 영국군과 술탄에 맞서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는 이날 “국내질서를 회복하지 못하고, 외국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할 줄 모르는 현 정부를 불신임한다. 이제 우리는 제국의 허울을 벗고, 터키 민족국가를 수립하여, 국난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군인에서 정치인, 혁명가의 길로 접어든 날이었고, 터키 국민들에게는 외세와 무능한 국가권력을 타도하고 제정분리를 표방한 세속주의 공화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벅찬 순간이었다. 투르크계 황실이 여러 민족 위에 군림하는 이슬람 제국에서 근대 터키 공화국으로 거듭나는 계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붕괴하자 케말은 터키 민족독립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점령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해 공화제를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명제 아래 정교분리와 정당정치 확립, 이슬람 전통복장 폐지, 남녀평등권 도입 등 신생 터키공화국의 근대화-민주화에 헌신했다.

오스만제국 시절에 현재의 그리스 영토인 살로니카에서 세관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케말의 본명은 흔한 이름인 무스타파(Mustafa)였다. 이스탄불의 군사대학에 입교한 무스파타는 군사학뿐만 아니라 수학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수학교사로부터 완벽함을 뜻하는 ‘케말’이라는 별명을 얻어, 10대 때부터 이를 자신의 정식 이름으로 사용했다.

1934년 터키 국회로부터 ‘조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타튀르크’라는 경칭을 헌정 받아 이를 자신의 성(姓)으로 사용했다. 터키인들은 아랍인의 관습대로 성을 사용하지 않다가 1934년 국회가 ‘성 사용법’을 통과시키면서 성을 쓰기 시작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그러나 4년 뒤인 1938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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