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아시아시대] ‘이기주의자들’과 공감하는 법

[아시아엔=박현찬 ‘마중물’ ‘원칙 있는 삶’ ‘경청’ 저자] “필요한 사람인가?” 불쑥 이런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만약 당신이 기업이나 조직의 책임자라면 당신과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먼저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일하는 회사에서 나를 계속 필요로 할까, 우리 가족은 정말 나를 필요로 할까, 나는 과연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일까 하는 식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문해볼 가능성이 더 크다. 혹은 단지 필요에 따라 취하고 버리는 삭막한 현실이라며 ‘나의 필요’와 ‘상대의 필요’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충돌에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나와 상대의 공존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현실, 우리는 항상 ‘나’와 ‘남’을 대립적으로 생각하고, 필요에 대해서도 ‘나의 필요(이기)’ 혹은 ‘남의 필요(때때로 강요된 이타)’라는 식으로 대립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나의 필요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싫고(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그렇다고 남의 필요에 따라 살아야하는 것은 더더욱 싫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을 비롯하여, 라 로슈푸코와 라 브뤼예르 등 17세기 ‘유럽의 현자 3인방’의 글을 연구한 적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들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기보다는 ‘필요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격변기 혼란 속에서 냉철한 현실주의 관점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았던 그라시안의 말이다. ‘인생론의 마키아벨리’로 불린 그는, “기대는 오랫동안 기억되지만 감사의 마음은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라며, “상대가 당신에게 고마워하기보다는 기대하고 의지하게 만들라”고 조언한다. 아무리 위선이 판치는 사회라고 해도 결국은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상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상대의 필요에 나를 맞춘다거나 상대의 필요에 휘둘린다는 뜻이 아니고 ‘상대의 필요를 나의 필요로 수용한다’는, 대인배의 지혜가 함축되어있다. 나의 필요(이기)와 상대의 필요(이타)를 대승적으로 종합하는 한 차원 높은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음모와 배신, 정치적 모략과 내전이 끊이지 않던 17세기 유럽. 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를 깊이 고민하며 인간의 위선과 허영, 이기심 등을 특유의 직관과 통찰로 예리하게 포착해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이 이기심과 이타심의 ‘모순’ 속에 있다는 것을 통찰하고 그 모순을 돌파할 수 있는 지혜, 즉 이기심과 이타심이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이해타산은 모든 죄악의 근원으로 비난받고 있으나, 동시에 모든 선행의 근원으로서 찬양받을 자격도 가지고 있다.” 라 로슈푸코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인정할 수 있으려면, 먼저 사람들이 제각각의 이해관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갈파했다. 그는 17세기 이후의 사회가 기본적으로 이해타산의 결과물인 ‘필요’가 가장 우선적인 가치가 되며, 필요가 상품을 만들고 상품의 교환이 지배적인 경제양식이 된다는 것을 예리하게 직시해냈다.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현실요구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이상적 요구(그런데 이타적 욕구도 이기적 욕구 못지않게 현실적 요구이다)는 항상 대립하고 갈등하는 관계이지만 사람들은 둘 사이를 조정하고 조화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해왔다. 어느 사회이든 싸움질만 하면서 발전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귀족사회와 인간에 대한 통찰과 비판을 담은 <성격론>으로 18세기 계몽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친 라 브뤼에르는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말하며 비난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의 그림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만일 남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돌이켜볼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단점을 고치기가 쉬울 거라고 한다.

타인 통해 자신 허물 살피는 용기 필요

자본주의의 비약적인 발전에는 상대의 악덕을 자신의 그림자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조정자들의 역할이 있었다. 이를테면 아담 스미스는 이기적인 인간들이 서로 상대방의 이기심을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상대의 이기심을 이해하는 것이 나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상대의 필요를 나의 필요와 조화시키는 것이 자본주의 시민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이기심을 악으로 이타심을 선으로 규정하고 양자를 대립적으로만 본다면, 인류의 미래는 암울하다. 인간은 결코 이기심을 버릴 수 없기에. 하지만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달리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바로 공감능력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인간은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공감적이다. 탐욕의 시스템과 형식적인 절차주의의 결탁으로 민주주의가 퇴색한 21세기에 이런 개념을 구상해본다.

‘공감하는 이기주의자’(empathetic egoist) 혹은 ‘공감적 이기주의’(empathetic egoism). (타인)공감과 이기주의는 대립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현실의 지혜는 대립의 사이에 존재한다. “미덕의 조직 속에는 악덕이 포함되어 있다. 약을 조제할 때 독소가 들어가는 것처럼, 빈틈없는 지혜는 양쪽을 적당히 섞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그것을 잘 사용한다.” 라 로슈푸코는 <잠언집>에서 미덕을 추구하기 위해 악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암시한다.

새로운 세기 즉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라는 말이 있다. 18세기 이후 동서양의 구분이 없이 근대화를 추구해온 결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인류문명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아시아가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인류문명의 새로운 세기는 이기심과 이타심이 공존하는 길을 여는 데 있다. 근대문명의 발원시기에 문제의 근원을 통찰했던 현자들에게서 희망의 단초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공감하는 이기주의자’다. 독생(獨生)을 위한 착한 척 위선(僞善)이 지배하는 시대에, 차라리 17세기의 현자들처럼 우리 모두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공생(共生)의 길을 추구하는 용기 있는 위악(僞惡)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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