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박정희, 닮은점·다른점
리콴유의 자서전 축약을 마치고
“리콴유…내겐 애증(愛憎)이 엇갈렸던 인물”
리콴유의 자서전 <싱가포르 이야기>(원제: The Singapore Story)는 상하권 합쳐 1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서(長書)로 필자는 최근 20여회 거듭 읽었다.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오랜 친구 김호준이 “리콴유가 언제 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냐? 리콴유가 한 짓, 괜찮은 것 같다 여기는 게냐?”고 물었다. 필자는 “음, 좋은 질문이야!”하고 좌중을 웃기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필자는 리콴유를 그다지 맘에 드는 인물로 여기지는 않았다. 싱가포르란 국가를 ‘깨끗하되 비겁한 나라’로 본 <뉴욕타임스>의 진단에 상당 부분 동감해왔다.
1965년 건국 후 오늘날까지 싱가포르에서 배출된 뛰어난 인물이 리콴유를 빼면 한 사람도 없는 게 사실이다. 건국 50년이 지나도록 노벨상 수상자도, 유명 문학작품도, 히트 친 영화도 하나도 없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있나, 김연아 같은 요정이 있나, 종교적 지도자가 나왔나…뭐 하나 국위를 떨칠 인물이나 작품이 하나도 없는 나라다.
굳이 있다면, 리콴유 덕분에 오늘날 세계 경제수준 4위를 즐기는 3백만~4백만 국민이 생겨난 정도다. 국민 한명 한명이 인간이 바라는 꿈과 인격, 그리고 아름다움과 가치를 추구하는, 이른바 지식층이 추구하는 ‘호모 사피엔스’로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뉴욕타임스>가 그 나라를 “비겁하다”고 평가한 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본 것이다. 리콴유는 깨끗하고 건강하게 사육된 가축으로 구성된 ‘싱가포르 목장’의 목장주일 뿐이다.
하지만 독후감 형식을 빌려 ‘칼’을 빼어든 이상, 한마디 하려한다. 필자가 리콴유한테 관심을 가져온 건, 그가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이 시대 마지막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한 시대적 배경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같은 식민지 시대를 겪었지만,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과거 식민지의 설움을 더 이상 겪지 않겠다는 각오에서 출발했지만, 둘은 다르다. 사람이 달랐던 것이 아니고 그 (식민)환경이 달랐다. 박정희는 천인공노할 ‘야쿠자 스타일’의 일제가 생산해 낸 피식민국가의 산품(産品)이었던데 비해, 리콴유는 같은 제국주의였지만 심성 깊숙이 인권과 법치를 깔고 있는 영제(英帝)의 제품이었다.
나라를 세우려면 권력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쥐는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도구의 선택으로 자기를 지배했던 식민국가의 방식을 그대로 전용했다. 박정희는 당시 군부독재라는 일본식 배경을 그대로 체득해 총구(銃口)에 기댔다. 모택동이 갈파했듯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리콴유는 자기를 키워준 영국을 본 떠 권력을 잡는 도구로 법구(法口)에 기댔다.
박정희가 싱가포르에서 태어났다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런던의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했을 것이 분명하다. 리콴유 역시 서울에서 태어났더라면 변호사가 아닌 장군이 됐을 것이다. 둘은 똑같이 지독한 수재였다.
총구를 택한 박정희는 소멸한 반면 법구를 택한 리콴유는 분명 영속할 것이다. 가설이 너무 거칠다구? 그렇지 않다. 환경은 그토록 지대한 영향을 준다.
리콴유에 대해 필자의 또 하나의 관심은 그가 철인국가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희랍 철학자들이 꿈꿔온 도시국가(폴리스)의 지배자는 보통사람이 돼서는 안 되고 자기들처럼 철학자를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 봤다. 그런 점에서 리콴유가 세운 싱가포르는(나라의 분류기준으로 볼 때도 그렇듯이) 도시국가.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실험국가’다. 지구상에는 몇몇 실험국가들이 존재해 왔다.
싱가포르 외에 칼 마르크스라는 수재급 유대출신이 추종자 레닌을 시켜 건립한 소련이 대표 케이스였다. 제(齊)나라의 공자가 이 나라 저 나라 기웃대면서 건립하고 싶었던 나라도 (어느 것 하나 성사된 건 없지만) 역시 실험국가였다.
필자는 지금의 중국도 엄밀히 말해 실험국가 대열의 하나로 본다. 실험국가 소련은 70년 만에 셔터를 내렸다. 중국은 건재하다. 그 이유는 리콴유가 덩샤오핑을 기술하며 표현했듯이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혁명을 책으로만 터득한데 반해 중국은 리콴유처럼 혁명을 직접 몸으로 체득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실전(實戰)파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싱가포르가 앞으로 영속하고 건재할 거로 낙관한다. 그 이유는 리콴유가 칼 마르크스 같은 이론가가 아닌데다 고르바초프 같은 책상물림도 아니며, 덩샤오핑과 기질 면에서 통했고 또 그를 가장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실리를 따지는 실용파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본 ‘인간 리콴유’는 어떤 사람인가? 이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평소 리콴유를 잘 따르고 나라 건설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독일 사람한테 리콴유가 묻는다. “당신은 왜 날 그리 좋아하시오?” 이에 독일인이 대답은 이랬다. “당신이야말로 가장 유교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거기에다 (서양의) 칼빈주의까지 함께 나타나 있구요.”
칼빈주의 하면 개신교 장로교회의 원류지만, 믿음을 불교처럼 고행(苦行)과 수련의 연장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판단해 엄격과 원론주의도 마다지 않는 한 마디로 ‘엄격주의’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리콴유는 엄격주의자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지도자로서 가장 이상적인 덕목으로 남한테는 관대하고 자신한테는 엄격한 것을 높이 친다. 리콴유는 만사에 엄격, 또 엄격했다. 자기를 낳은 아버지에 대한 언급만 봐도 화가 난 아버지가 어린 유아시절 자신의 두 귀를 잡아 우물 속에 던지겠다고 위협한 대목만 기술되어 있을 뿐 아버지한테 뭘 배웠고 뭘 계승했는지는 한마디도 늘어놓지 않고 있다. 딱 한 구절, 자신이 아이들을 한번도 때린 적이 없다며, 그 이유를 어린 시절 (아버지한테) 당한 공포 때문임을 넌지시 비쳤다. 자신의 진실을 밝히는 자서전을 쓰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점에서 “나이 열여덟까지 말처럼 일만 해주다 집을 뛰쳐나왔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의무는 다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힌 아브라함 링컨과 참 비슷하다. 링컨은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물론, 장가갈 때도 아버지를 초청하지 않았다. 링컨 역시 엄격 또 엄격하기로는 리콴유처럼 독종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엄격한 사내란 얘기다. 이런 성격일수록 지독한 이기주의자여서 주위에서 가끔 느끼듯 이런 인물이 옆에 같이 자리를 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 리콴유가 사육(飼育)한 싱가포르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여겨진다. 리콴유나 싱가포르에 관해 우리가 부정적이고 심지어 반발까지 느끼는 배경에는 바로 이런 ‘정나미 떨어지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도 필자가 리콴유한테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동남아를 여행해 보면 사람들이 단순하고 무책임하고, 더럽고, 시끄럽기는 왜 그리 시끄러운지. 몸에 지닌 세포라고는 돈(錢) 세포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고 영어는 하나같이 왜 그리 ‘쏼라쏼라’ 지껄여대는지 모르겠다, 대부분 화교들이다. 화교를 볼 때마다 ‘아, 내 관심 권 밖에서 저런 삶이 나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어지고 있구나’ 하며 살 맛이 뚝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동남아 화교 치고 여권 두세 개 안 가진 사람이 없다. 여차하면 딴 나라도 튈 사람들, 그렇게 수백년 살아 온 그들이다. 바로 그 화교인 리콴유가 그런 걸 몰랐을까? 외국인들한테 그 화교들이 과연 어떻게 비춰질지, 또 이대로 놔 둘 경우 과연 무엇으로 끝날지 몰랐을까? 화교들이 한층 꼴사나운 건 다른 동남아국 사람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이다.
그러니 싱가포르라는 나라의 건국에 리콴유가 왜 그리 목숨을 걸었을까 이해가 된다. 싱가포르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완제품’ 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완제품 수준을 향해 제대로 전진하고 있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한마디로 나라다운 나라가 서는데 필수불가결의 요소인 기강이 선 나라다. 지구상에 2백개가 넘는 나라가 있지만, 몇몇 나라를 빼면 대부분 기강이 없다. 리콴유는 이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제식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10년 전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필자는 워싱턴에 근무 중이었다.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장문의 서평을 읽고 언젠가 기필코 이 책을 독파하리라 마음 먹었었다. 게으름을 피운데는 리콴유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다.
리콴유는 필자가 젊어 외신기자로 밤을 홀딱 새던 시절, 많은 추억을 남긴 인물이었다. 기자 초년시절 외신부(요즘 국제부)에 배치받아 5년 남짓 와이어(wire)실을 들락대며 뉴스를 찾느라 눈이 벌개져 있을 때마다 리콴유는 외신을 타고 등장했다. 한마디로 ‘뉴스의 인물’이었다. 사흘 멀게 밀어 닥치던 야근 때마다 콩 볶듯 밤새껏 타닥거리는 AP, UPI, AFP, 로이터 등 4개의 와이어에서 뉴스를 찾아내 번역하던 시절 얘기다. 좀 과장하면 세계가 내 수중에 놀던 시절이다. 그때 밤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던 인물이 리콴유다.
와이어를 찢어 번역하며 속으로 “어느 놈은 동남아 거지같은 나라의 수상이랍시고 뉴스를 타고, 어느 놈은 죽어라 번역만 해야 하니 이리도 불공평할 수 있나” 하고 욕도 많이 퍼부었다. 당시 리콴유의 나이 쉰다섯 남짓 되던 시절이다.
필자가 이후 정치부 소속으로 외무부(지금의 외교통상부)를 출입하던 당시 일이다. 그가 서울에 온다기에 취재하러 김포공항에 나갔다. 당시 외무부 장관이 트랩에서 내린 리콴유를 향해 “하이!”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 장관을 빤히 쳐다보던 리콴유가 한국측 의전책임자를 조용히 부르더니 “당신네 나라 외무장관, 어디서 공부했던 분이오?” 하고 물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어따 대고 ‘하이’냐?”라는 자세였다. 케임브리지 출신의 정통 브리티시 영어권 사람임을 넌지시 과시한 거였다. 한마디로 기분 상했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속으로 고소했다. ‘영국식 영어 좋아하네….’
직접 목격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리콴유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를 더 소개한다. “하이!”가 아닌, 또 한명의 우리나라 외무장관이 싱가포르를 방문해 그와 회견 한 적이 있다. 리콴유를 만나고 나온 그 장관이 식식 댔다. 그 장관과 동행해 싱가포르에 갔던 한국일보 외무부 출입기자가 궁금하여 장관한테 물었다. 장관은 계속 화만 낼 뿐이었다. 그 기자가 화제를 돌리는 척 하며 다음과 같이 돌려서 질문했다. “리콴유 영어, 어떻습디까?” 평소 다혈질이던 그 장관은 질문을 받자 드디어 포문을 열었다. 다혈질인 그 장관이 하는 말 “그 빡조(경상도 사투리로 곰보) 녀석! 그 빡조가 말이야…내 원 더러워서…!” 하더란다.
고시출신이었지만 영어가 별로였던 경상도 출신의 그 장관이 자신의 서툰 영어를 리콴유의 얽은 얼굴로 화풀이 한 것이었다. 리콴유, 그는 필자에겐 애증과 오해가 엇갈렸던 인물이다. 적지않은 인연 속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