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창조 경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체력과 기술력’,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인 대부분은 ‘우리 축구는 기술력보다는 체력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한국축구가 기술력보다 체력이 더 약하다”고 말했다. 월드컵 16강 수준에서 보면 두 가지 모두 약하지만, 체력보다는 기술력이 조금 더 나은 편이라고 주장했다. 히딩크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후 대표팀 평가전의 성적으로 인해 히딩크 감독에 대한 맹비난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히딩크 감독은 한국대표팀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체력훈련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월드컵 개막 6개월 전까지 준비기간 대부분을 선수들 체력강화에 할애했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인력은 어떤 사람들인가. 대학이나 기업에서 모두 바람직한 인재상으로 창의적 인재를 꼽는다. 굳이 창조경제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지금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능력은 무엇인가. 창의성이라고 한다. 한국사회가 발전하고 더 나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창의성 개발이고 창의력 증진이다. 그러면 어떻게 창의성을 증진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한국인 능력 중에서 논리력과 창의력, 둘 중 어느 쪽이 더 부족한가? 대개는 창의력이 더 부족하다고 할 것이다. 창의성이야말로 한국인에게 가장 취약한 능력이라고까지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창의력도 부족하지만, 논리력이나 합리적 태도가 더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의견을 말한다면, “창의성의 부족보다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태도의 부족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창조경제를 이루려 한다면 더욱 그렇다.
소위 현대화된 나라 중에서 한국사회처럼 비합리적인 사회가 또 있을까. 주지하다시피 방송과 매체에서는 시청률과 클릭수가 왕이다. 시청률이 높으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그리하여 시청률이 제왕인 사회에서는 막장 드라마가 하나의 지배적 장르로 자리잡는다. 막장 드라마는 개연성을 무시하고 자극적인 전개를 일삼는 드라마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토리텔링의 바이블격인 <시학>에서 인간과 세계의 객관적 원리를 무시하고 극적인 자극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피해야 할 ‘악덕’이라고 경계했다. 극에서 제기된 갈등에 대해 진정성 있는 대결을 통해 개연성 있는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시청자를 자극하고 자기 몸값을 올리는 차원에서 극적인 전개에만 골몰하는 작가의 비논리적, 비합리적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도 황금 시간대의 드라마에는 현실을 무시하는 기발한 허구적 판타지가 난무한다. 시청자들은 비현실적 판타지에 몰입하고 즐거워하고 심지어는 욕하면서도 드라마를 떠나지 못하고 시청률을 올리는 데 기여한다. 대중문화를 선도한다는 방송국은 광고주와 함께 행복하고, 작가와 스타의 몸값은 지속적으로 동반 상승한다. 분야와 장르는 다르지만 또 다른 막장을 저녁 뉴스시간에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도하는 방송에서 그렇다. 대체로 그들은 객관성보다는 자신이 소속된 정당이나 이익 계층의 논리로 사유하고 행동한다. 흔히 사실과 의견을 뒤섞고 사심 가득한 의견을 분명한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자니 말 좀 한다는 정치인이나 토론 좀 한다는 논객일지라도 기껏해야 현실을 호도하는 교묘한 형식논리를 들고 나온다.
합리적 태도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리고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진영논리가 승리한다. 이런 비합리성의 지배는 경제계에도 관철된다. 이를테면 경제부처 장관들은 자신이 기고했던 대학교수 시절의 신문 칼럼과 정반대 주장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부르댄다. 그런가 하면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업이라며 밤낮 없이 이미지를 퍼뜨리고 있는 기업의 대주주는 사익을 위해 탈법이나 불법을 감행하고 기업이익을 축내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경제 공동체의 이익보다 한 계층의 이익, 심지어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업의 이익보다 한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바로 이들의 비합리적 매커니즘이다. 물론 이러한 모든 비합리성을 관통하는 하나의 논리가 있다. 그것은 개인의 사적 이익의 무한 추구를 변호하는 ‘합리화 논리’라는 것이다. ‘합리’와 ‘합리화’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때때로 합리를 가장한 합리화도 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합리가 객관적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면, 합리화는 주관적 개인의 이기심에 근거를 둘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합리적 태도와 창의성, 또는 합리적 사고력과 창의성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일견 합리성이나 논리성은 창의성과 대비되는 능력으로 보인다. 우리 주변에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이 강하면 대체로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많이 퍼져있다. 수학을 잘하는 공대 출신들이 수학을 싫어하는 문과 출신들보다 감성이나 상상력, 나아가 창의성도 조금 약한 것 같은 느낌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치에 가깝다. 심지어는 막장 드라마의 기상천외한 발상이나 정치인들이나 일부 경제인들의 기발무쌍한 논리전개를 접하게 되면 그들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창의성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하게 된다. 창의성과 관련한 오해 중에 가장 흔한 것은 기발한 발상과 창의성을 혼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중으로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것처럼 현실에 없는 기발한 착상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왕왕 그렇듯이 기발한 아이디어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그러한 아이디어를 자신의 문제 해결에 적용시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마구 뿜어내는 발산적 기발함은 오히려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기발한 아이디어 자체보다는 주어진 문제영역에 대해서 포괄적이고 다각적이고 심도 있는 비판적 이해 능력과 몰두 능력이 더 중요하다. 창의성이란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하며, 문제와 관련된 여러 요소들을 종합해보고, 발상 전환적 아이디어 중에서 어느 발상전환이 가장 적절한 것인가를 평가해낼 줄 아는 합리적인 사고 능력에 더욱 가깝다. 논리와 비판적 사고의 연구와 체계화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서울대 김영정 교수는 과로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창의성과 논리적 사고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창의성이 매개되지 않은 비판적(논리적) 사고 작업은 충분히 가능하나, 비판적 사고능력이 매개되지 않은 창의적 작업은 불가능하다”고. 다시 말해서, 논리적 사고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창의성이 발휘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말이 있다. 사회에 만연한 비합리적 사고와 태도를 개선하지 않으면서 창의적이 되고자 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히딩크 감독은 “체력이냐 기술력이냐” 하는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관건은 ‘체력과 기술력 사이’의 관계였다. 축구실력은 체력을 바탕으로 기술을 발휘하는 능력이다. 히딩크 감독이 체력의 부족을 강조한 것은 그것이 실력의 발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창의적 인재가 되고 싶은가. 창의적 능력을 키우고 싶은가. 창조 경제를 발전시키고 싶은가. 그러면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 자기합리화’라는 비합리의 장애물부터 제거해야 한다. “아무리 창조경제를 만들겠다고 외쳐도 사회에 만연한 비합리를 확실하게 혁파, 개혁하지 않으면 그것은 정말 연목구어이기 때문”이고, “합리적 태도와 비판적 논리력의 바탕이 없이는 창의력을 증진할 수도 발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