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55] ‘국부론’ 아담 스미스가 사마천의 ‘화식열전’ 읽었다면···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 아담 스미스는 상품의 생산과 분배는 국가의 통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기능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이끈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수입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흔히 그 자신이 진실로 의도하는 경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킨다.” <국부론>

사마천과 아담 스미스의 견해는 유사성의 차원을 넘어 근원적으로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그 힘을 다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사마천과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이끈다”는 아담 스미스의 견해는 경제활동의 동력이 개인들의 ‘이익 추구’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려는 개인들의 경제활동을 국가가 나서서 규제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다.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자유방임주의’는 아담 스미스가 1776년 <국부론>을 출간하면서 정식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1900여년 앞선 기원전 2세기 말에 사마천이 이미 자유방임주의 사상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은 사마천의 놀라운 혜안과 동양사상의 심대함을 반증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빈부의 도란 빼앗거나 안겨 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마천은 노자의 사상을 존중했지만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노자는 이상주의자였지만 사마천은 현실주의자였다. 노자는 ‘도道’라는 추상의 논리로 백성을 계몽하려 했지만 사마천은 ‘이利’라는 현실의 논리로 백성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욕망이 곧 자연이라는 게 사마천의 생각이다. 그래서 빈부의 도란 빼앗거나 안겨 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농부가 자기의 생산품을 내놓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 식량을 얻지 못하고, 공인이 자기의 생산품을 내놓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 도구를 얻을 수 없게 된다. 또 상인이 무역을 하지 않게 되면 가장 귀중한 삼보三寶의 왕래가 끊어지고, 우인이 자기가 생산한 산품을 내놓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 재화 결핍에 직면하게 된다. 재화가 결핍되면 산림과 수택水澤은 더 이상 개발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네 가지 측면은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의 원천이다. 원천이 크면 곧 부유하고 풍족해지며, 원천이 작으면 곧 빈곤하고 결핍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 위로는 나라가 부유해지고 아래로는 가정이 부유해진다. 빈부의 법칙은 어느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줄 수도 없으며, 지혜로운 자는 능히 부유해질 수 있고, 어리석은 자는 빈곤해진다. <화식열전>

빈부의 도는 국가가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자유방임주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의식주는 백성의 삶을 지탱해주는 근원으로,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활발함의 규모에 의해 풍요로워진다. 그 근원이 크면 백성들이 부유해진다는 사마천의 설명은 백성의 부가 곧 나라의 부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도 국민의 부가 곧 국가의 부라고 했다. 교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은 부유해지고 모자라는 사람은 가난하다는 것은 개인들의 학식에 따라 빈부가 결정된다는 의미보다는 시장의 논리를 이해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배움이 많은 사람이라도 시장의 논리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빈부의 도란 빼앗거나 안겨 주어서는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마천의 논지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시장의 논리를 외부에서 강압적으로 조절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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