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52] ‘태백산맥’ ‘정글만리’의 조정래는 ‘사회주의 관료’를 어떻게 봤나?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 아들을 잃은 애절한 심정과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냉철한 혜안이 담긴 범려의 독백은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범려가 살인한 아들을 구명하려 했다는 점에 대해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의 행동을 돈으로 죄를 무마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돈의 위력과 그 위력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돈을 소유하려는 욕심보다 때로는 그 돈을 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장남은 돈을 모을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쓸 줄 몰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막내아들은 풍족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움을 몰랐기에 인색하지 않았다. 범려가 막내 아들을 똑똑하게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그가 환경적으로 부유한 시절에 태어났기에 돈에 인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보내려 했던 것이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그 대신 자칫하면 개성이 삐뚤어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엘리트에게 천박한 고생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이치가 아닐까? 어떻든 살인을 한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했지만, 아버지로서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어 돈의 위력을 빌어 자식을 살리려고 했던 범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부유해지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은 정해진 주인이 없다. 돈은 움켜질수록 해害가 되고 널리 베풀어 나누어 줄수록 약藥이 된다.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화식열전>에 나오는 부자들은 모두 사물의 이치를 헤아려 행동하고 시세의 변화를 살펴 그 이익을 취했다. 한 가지 일에 전념하고, 남들과 다른 안목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자신이 쌓은 부를 덕으로 베풀어 지켜냈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사마천은 “부유해지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은 정해진 주인이 없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진다”는 말로 부의 형성 원칙을 설명했다.
부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사회주의가 종언을 고한 이유는 바로 인간의 본성을 제도로 억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부에 대한 욕망을 무조건 탐욕으로 규정하는 도덕적 판단은 지양해야 한다. 전한前漢 시대 회남왕淮南王이 쓴 <회남자>에 “도둑질로 잘 사는 사람도 있으나 잘 사는 사람이라고 모두 도둑질한 것은 아니다. 또한 청렴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으나, 가난한 사람이 다 청렴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우리가 <화식열전>을 어떤 관점에서 읽어야 할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부를 이룬 사람이 다 도둑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이 다 청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깊이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나쁜 정치는 재산을 가지고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 경제활동의 토대는 인간의 욕망이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욕망하지 않는 삶은 곧 죽음”이라고 했다.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이다. 나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며, 그것은 인간행동의 출발점이자 근원이다. 1990년대 초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게 된 주요요인은 바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었다.
소설가 조정래는 <인간연습>이라는 소설에서 분단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해온 장기수의 시각을 통해 사회주의의 몰락 원인과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을 시도했다. 조정래는 작가의 말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결국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라고 썼다. 연습이란 바로 욕망의 실천이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개인들의 부단한 노력과 욕망이 역사라는 커다란 그림을 그려왔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그러한 인간들의 본성을 일거에 차단해 버렸다. 이 점에 대해 조정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사를 통해 인간을 끝없이 연구해 온 철학이나 종교에서도 인간은 불확실하고 미완성인 존재로 규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존재들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완벽할 수 없지요. 특히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인간을 충분히 개조할 수 있다고 어리석을 정도로 확신했어요. 당은 무오류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오류입니까? 그 커다란 오류 위에서 인간들의 본능적인 욕구, 이를테면 사적 소유나 권력의 횡포와 맞닿아버린 겁니다. 사회주의 관료들은 봉건 시대의 탐관오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인류사의 불행이긴 하지만, 더러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면서 또 새롭게 모색하고 시도하는 그 끝없는 되풀이야말로 인간 특유의 아름다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