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조정래 ‘인간 연습’···잊혀진 이름 ‘전향장기수’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되살린 분단시대 그림자

작가 조정래는 자신의 특이한 기록 두 가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먼저 잡지나 신문 연재할 때 원고가 늦어져서 독촉전화를 받은 일이 한 번도 없다. 대략 6개월치를 미리 쌓아놓고 연재를 시작했다. 둘째 내 원고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끗한 원고다. 한 문장을 세 번씩 생각하고 쓰는 습관을 들였기 때문에 원고가 깨끗해질 수밖에 없고, 문장이 안 되거나 한 획이라도 틀리면 반드시 찢어버린다. 원고가 지저분해지면 내 영혼이 혼란스러워지고 혼탁한 느낌이 들어서다.”

조정래가 만 63살을 지나던 2006년 6월 펴낸 <인간 연습>(실천문학사, 2006년) 역시 그의 특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20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 어느 한 구석에도 어색한 표현이나 오탈자는 물론 띄어쓰기 잘못을 찾을 수 없다. “게으름은 죄악”이라고 여기는 그답다.

소설은 전향장기수 윤혁이 고통과 좌절, 분노와 불신, 혐오에서 마침내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잊혀진 보통명사 ‘전향장기수’의 일그러진 삶을 다룬 이유는 작가후기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내 문학에서 분단문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소설을 썼다”고 했다. 조정래가 앞서 대하소설 <태백산맥><아리랑> <한강> 등에서 분단문제를 다룬 것도 다음의 그의 ‘작가관’을 보면 수긍이 간다.

“진정한 작가란 어느 시대, 어떤 정권하고든 불화할 수밖에 없다. 모든 권력이란 오류를 저지르게 돼있고, 진정한 작가는 그 오류들을 파헤치며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정치성과 전혀 관계없이 진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진보성을 띤 정치세력이 배태하는 오류까지도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끝없는 불화 속에 외로울 수밖에 없다.”

<인간 연습>의 윤혁. 남파간첩인 그는 80년대 말 동구권 몰락과 1993년 김영삼 정부 초기 비전향장기수 북송의 충격, 그리고 감옥 속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30여년 만에 전향서에 손도장을 찍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지만. 더욱이 전향 후에도 자신들 집안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강제로 전향을 당했더라도 일단 전향서에 손도장을 누르면 사장의 변절자, 혁명의 배반자”라는 꼬리표가 그림자처럼 뇌리에 붙어있다.

윤혁은 스스로 시대의 짐을 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남북한 어느 쪽도, 가족과 자신조차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아로부터의 실종,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그러나 그를 구해낸다. 그것은 이념도 종교도 아닌 또다른 주변인들이다. 부모 없이 자라 좀도둑질로 허기를 채워야 하는 어린 남매와, 노동운동하다 감옥에 들어와 말벗이 돼온 청년(강민규)이 그들이다. “이 아이들을 알기 전에는 오래 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칙칙한 안개가 낀 우울한 나날이 햇살 화창한 날로 바뀐 것이다.” 강민규는 윤혁에게 세상과 관계 맺는 통로이자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토론자다. 건전한 보수와 생산적 진보를 조화시켜 좌우의 날개로 균형을 잡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구상으로 시민운동을 계획하는 강민규는 윤혁에게 수기 쓰기를 권고한다. “분단시대를 온몸으로 떠안고 가장 정직하게 살아오신 분”이라면서.

윤혁은 내세울 것 없는 일생이지만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수기를 써나간다.

···서해안으로의 침투, 북에 두고온 아내의 얼굴, 자신을 신고해 사형을 받게 한 옛 친구,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 선고와 함께 느낀 환희가 자괴감과 암담함으로 변해간 일, 자신으로 인해 몰락한 가족, 마음을 돌려 일가친척들을 살게 해야한다는 아버지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드리지 못한 일, 비몽사몽간 전향서에 손도장을 찍던 일 등등···.

수기가 출간되자 한국전쟁 당시 간호원으로 있으면서 부하를 먼저 치료해달라고 부탁한 동명이인 ‘윤혁’이라는 인민군 장교에게 감동했던 최선숙의 권유로 윤혁은 ‘꽃두송이’와 함께 거처를 그가 원장으로 있는 보육원으로?옮긴다. 보육원에서 윤혁은 변소청소도 하고 아이들 공부도 도와주며 행복을 느낀다.

<인간 연습>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작가 조정래는 책(소설이 아닌) 첫 장에 이렇게 썼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결국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상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