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50] 부자되고 싶은 당신, 백규와 범려를 배우라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 우리 사회에서도 간혹 재산이 적은 것이 청렴의 상징으로 마치 무슨 자랑거리가 되는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사마천의 경제논리에 의하면 자기 처지에 걸맞은 부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무위도식한 사람으로서 무능력자로 보고 있다. 가끔 공직선거에 입후보한 사람 가운데 마이너스 재산을 신고한 사람이 있는데 정말로 그렇게 빈궁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공직을 맡을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나는 본다.

현실은 어느 측면에서 아주 냉혹하다. 먹고 사는 일이라는 차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마천이 파악한 현실이란 “상대방의 재산이 자기보다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며, 천 배 많으면 그의 일을 하고, 만 배 많으면 그의 하인이 되는” 이치가 지배하는 곳이다. 세상을 다스리려는 지도자나 인의를 설파하려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현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는 관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라는 것은 “재산이 있는 데서 생겨나고 없는 데서 사라진다”고 했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여들고, 모두 이익을 위해 떠난다”는 것이 그가 파악한 현실의 작동원리다. 그러하기에 1000승?의 왕도, 1만가家를 가진 후候도, 100실室을 가진 대부도 가난을 걱정하는데 하물며 백성들이야 어떠하겠는가, 하고 사마천은 되묻고 있다.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백규와 범려한테 배우는 부자 되는 지혜···‘인기아취 인취아여’

주나라의 백규白圭는 시세의 변동을 잘 통찰해서 부를 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부자가 된 비결에 대해 사마천은 “세상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때는 사들이고, 세상 사람들이 사들일 때는 팔아 넘겼다.(人棄我取 人取我予)”라는 말로 요약했다. 하여 백규의 상술은 천하 사람들이 장사의 근본으로 삼아 서로 본받고자 하였다.

‘인기아취 인취아여’란 언뜻 보면 매점매석을 통해 가격을 급등시켜 폭리를 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당시의 평민들은 돈을 아끼려고 값싸고 질이 약간 떨어지는 곡물을 사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매점매석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면 평민들이 주로 사는 값싼 곡물들을 일시에 사들였다가 나중에 큰 이문을 남기며 다시 팔아야 했다.

그러나 백규는 그리 하지 않았다. 일부 간상奸商들은 물건이 넘칠 때 일부러 더욱 압박을 가함으로써 가격을 최저치로 끌어내린 뒤 비로소 사들였지만 백규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시장에 물건이 귀해졌을 때 간상들은 매점매석했지만, 백규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여 사람들의 수요에 맞췄다. 시장을 혼란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수급과 가격을 조정하여 시장을 안정시킨 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 백규의 경영방식이다.

백규는 “임기응변하는 지혜가 없거나 일을 결단하는 용기가 없거나 주고받는 어짊이 없거나 지킬 바를 끝까지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내 방법을 배우고 싶어 해도 끝까지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은 부를 얻기 위해서는 ‘지혜와 용기와 어짊과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주고받는 어짊’이라는 말은 움켜쥐기만 하고 베푸는 것에는 인색한 졸부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그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온다. 또한 백규는 돈을 많이 벌었다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우쭐댄 것이 아니라 검소한 생활로 자신을 절제하며 지냈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거친 음식을 달게 먹고, 하고 싶은 것을 억눌렀으며, 옷을 검소하게 입고, 노복들과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했으며, 시기를 보아 나아가는 것은 마치 사나운 짐승이나 새처럼 빨랐다”고 했다. 이는 기업의 경영자들이 꼭 명심해야 할 내용이라 여겨진다.

백규가 ‘주고받는 어짊’을 말한 것처럼 범려范?도 나누고 베푸는 모습을 보였다. 월나라 왕 구천은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씻기 위해 계연計然과 범려를 기용했다. 계연은 범려의 스승이다. 그는 구천에게 일곱 가지 계책을 제시해 월나라를 10년 만에 부강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다. 범려는 구천이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인물이라 여겨 월나라를 떠나 치이자피?夷子皮라는 이름으로 제나라에 머물다가, 다시 도陶로 가서 주공朱公이라는 이름으로 살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범려는 계연이 제시한 일곱 가지 계책을 나라의 경영이 아닌 집안의 경영에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계연이 구천에게 제시한 계책의 근본은 “전쟁이 있을 것을 알면 미리 방비를 해야 하고, 때와 쓰임을 알면 그때 필요한 물건을 알게 됩니다”라는 말에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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