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47] 프란체스코 교황이 세월호의 선장이었다면

몸통과 깃털은 하나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세계반부패운동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에서는 각 나라의 공직사회와 정치권 등의 부패 정도를 점수로 환산해서 청렴도 순위를 매기는 활동을 하고 있다. 총 175개국을 대상으로 한 2014년 국가청렴도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100점 기준으로 55점을 받아 43위를 했다. 43위라는 순위에 자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1위를 한 덴마크의 점수가 92점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내심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수에 근거해본다면 관료들 중 열에 다섯은 청렴하지 못하다는 추론을 해볼 수도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성탄메시지에서 바티칸의 관료주의를 ‘병든 몸’에 비유하면서 신랄하게 비판을 해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바티칸의 관료들은 영적인 치매에 걸려 있으며 경쟁심과 허영심으로 가득해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는 것만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교황들도 인류 보편의 영적 성숙을 위한 사명에 집중하기보다는 바티칸에서 일하는 관료들의 아첨 속에 스스로를 방치한 ‘자기도취적인’ 인물들이었다고 혹평했다. 관료의 타락은 그 조직 전체의 인상을 규정한다.

교황은 “언젠가 사제들은 비행기와 같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추락할 때만 뉴스거리가 된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푸르른 창공을 훨훨 나는 이들도 많다. 추락하는 한 명의 사제가 교회 전체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통해 관료의 타락이 조직 전체에 끼치는 영향을 설명하였다. 세상에는 추락하는 비행기보다 제대로 항로를 찾아 멋지게 날아가는 비행기가 많다.

영적인 치매에 걸린 바티칸의 관료와 관료들의 아첨에 도취한 교황의 모습은 바티칸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나라의 상황에 견주어도 한 치의 그릇됨이 없는 바라 여겨진다. 권력자의 측근에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고위관료들과 그들의 아부에 심취해 국민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통치자의 자기도취는 지금 우리 정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혹리의 몸통은 바로 권력자다. 깃털의 상태는 몸통의 건강성에 의해 규정된다. 병든 몸통에서는 아름다운 깃털이 나올 수 없다. 아름다운 깃털이라도 몸통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 빛깔을 잃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자주 제기되고 있는 몸통론과 깃털론은 단순히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는 시비是非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몸통과 깃털은 하나다. 둘이 어떻게 어울려 아름다운 새의 자태姿態를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한신의 치욕 삼종세트···신취욕식晨炊?食·표모반신漂母飯信·과하지욕?下之辱

정장의 아내는 한신을 귀찮게 여겨, 새벽에 밥을 지어 이불 속에서 먹어치우고는 식사 시간에 맞춰 한신이 가도 밥을 차려주지 않았다.……무명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 가운데 한 아낙이 한신이 굶주린 것을 보고 밥을 지어주었는데 빨래를 다할 때까지 수십 일 동안을 그렇게 했다._「회음후열전」

“치욕이란 우리들이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표상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스피노자가 그의 저서 <에티카>에서 한 말이다. 그는 또한 치욕과 수치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치욕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동에 뒤따르는 ‘슬픔’이고, 수치는 추한 행동을 범하지 않게끔 인간을 억제하는 치욕에 대한 ‘공포 또는 두려움’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아울러 스피노자는 “명예란 우리가 타인에게 칭찬받는다고 표상하는 우리의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라고 했다. 그의 논리에 따른다면 치욕이란 인간의 자존과 명예를 훼손했을 때 발생하는 감정인 셈이다.

치욕은 원한감정과 복수심을 유발한다. 한신은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대장군이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힘은 치욕의 인내에 있었다. 한신은 대장군이 되기 전에는 별 볼일이 없는 인물이었다. <사기>의 ‘회음후열전’을 보면 그는 가난하고 방종해서 관리가 될 수도 없었고, 장사를 해서 살아갈 능력도 없었으며, 항상 남의 뒤를 따라다니며 먹고 사는 인물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은 한신을 싫어했다. 한신은 마을의 우두머리 관리인 정장停長의 집에서 밥을 여러 번 얻어먹었는데, 이를 고깝게 여겼던 정장의 부인으로부터 치욕스러운 일을 겪게 된다. 그를 귀찮게 여긴 부인이 새벽에 밥을 지어 이불 속에서 먹어치우고는 밥을 얻어 먹으러 온 한신에게 밥을 차려주지 않았다. 이불 속에서 몰래 내가 다 먹을지언정 너 같은 한심한 놈에게는 밥을 줄 수 없다는 심사였다. 이에 치욕을 느낀 한신은 정장과 절교를 한다.

‘신취욕식晨炊?食’의 수모를 당한 한신은 무명 빨래를 하는 아낙漂母에게도 무시를 당했다. 빨래를 하던 아낙은 한신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수십일 동안 밥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감동을 한 한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은혜에 보답을 하겠다고 하자 표모가 화를 내며 “사내대장부가 제 힘으로도 살아가지 못하기에 내가 젊은이를 가엽게 여겨 밥을 드렸을 뿐인데, 어찌 보답을 바라겠소”라고 했다. 한신을 제 입 하나 건사 못하는 형편없는 인물로 여긴 것이지다.

빨래하는 여인이 한신에게 밥을 줬다는 ‘표모반신標母飯信’은 ‘신취욕식’과 함께 한신이 여인들로부터 밭은 수모와 치욕을 나타내는 고사다. 이와 함께 네가 겁쟁이가 아니라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보라는 마을 건달의 요구에 그저 말없이 가랑이 사이를 기었다는 ‘과하지욕?下之辱’은 한신이 겪었던 치욕의 삼종세트 하일라이트다. 사정이 이만하면 원한과 복수심으로 그들에게 대들어 봄직한데 한신은 그것들을 참고 넘어갔다.

치욕과 수치는 대성大成의 계기가 될 수 있다. 한신은 세 번의 치욕을 인내함으로써 대장군이 되었다. 사마천은 남자의 기능을 거세하는 궁형宮刑의 치욕을 감내하여 <사기>라는 불후의 명저를 남겼다. 치욕과 수치는 인생의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치욕에 대해 복수를 하거나 아니면 인내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둘 중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문제는, 치욕과 수모를 당하고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아둔함이다. 자존自尊이 없는 사람은 치욕과 수치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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