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42] 4·13총선 후보들에게 ‘데미안’ 일독을 권하는 까닭

개의 줄을 놓아 방향을 알려주다···소규조수蕭規曹隨와 복거지계覆車之戒의 지혜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남의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 사람을 일러 ‘청개구리’ 같다고 한다. 모든 일에 엇나가고 사리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주로 청소년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청소년기에는 어른들에 대한 반발심리가 아주 대단하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심리를 ‘질풍노도의 시기(Sturm und Drang)’라고 한다. 이는 이성보다는 격정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에 비유한 것이다.?질풍노도는 계몽주의에 반발한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모토였다. 합리성을 앞세운 기성세대의 담론에 대항해서 감성과 상상력의 해방을 내세운 젊은 문인들의 반항적 외침이 바로 질풍노도의 근간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질풍노도의 사상적 경향을 대표하는 소설이다. 이성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시절에 그러한 규범을 깨고 오로지 자신의 감성에 충실했던 베르테르의 모습은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굉장히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을 하는 젊은이들이 생겨 사회적인 문제까지 되었다고 하니 그 영향이 실로 대단했던 것 같다.

한국정치의 유아적 습성

질풍노도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은 기성세대에 대한 극렬한 ‘반발’이다. 이때의 반발은 제도와 이념에 대한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남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반발을 앞세우는 청개구리 심보와는 차이가 있다. 비판에 입각한 반발은 사회적인 맥락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질투나 시기에서 유발된 습관적인 반발은 비非사회적인 행동이다. 사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지겹다는 인간의 보편 심리를 반영한 것이다. 일정 부분 수긍이가는 면이 있다. 그러나 좋은 말은 당연히 좋은 말이다. 옳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개인의 심리가 문제지 정당성 자체가 문제 되는 건 아니다.

청개구리 심보란 타인에 대한 긍정의 결핍을 의미한다.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의 논리에 대해 쉽게 긍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들도 어른이 되기 마련이다. 어른이 되면 그 이전에 품었던 반발심은 자연히 해소가 된다. 청소년들의 청개구리 심보는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필히 겪어야할 일종의 성장통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성장소설이라고 하는데, 이는 청소년기의 갈등과 방황을 통해 보다 높은 삶의 가치를 획득해 정식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 소설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로 타인의 가치체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청개구리 심보를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어 사회적인 비난을 받는다. 우리는 일상에서 어른답지 못한 어른을 자주 목도한다. 특히나 정치권에서는 이런 행동이 참으로 큰 문제가 된다. 우리나라 근대 정치사의 특징은 전前 정권으로부터 일절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권을 잡게 되면 이전의 정권에서 행해진 정책을 무시하고 무조건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 정권의 장점은 단절이 되고 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지난 정부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 추진하는 것을 마치 자존심 상하는 일처럼 여기는 것 같다.

물론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제도와 정책을 바꿀 필요는 당연히 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다고 몇 십년 동안 지속되었던 행정조직과 정부조직을 일거에 뜯어고치는 나라가 어디에 있나? 이러한 행태는 국정의 비효율성과 낭비를 초래하여 결국에는 국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가게 된다. 지난 정부의 장점은 타산지석으로 삼고 단점은 반면교사로 삼아 나라의 발전을 강구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사기>의 <조상국세가>에 ‘소규조수蕭規曹隨’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소하가 만든 법과 제도를 조참이 그대로 지켜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내용이다. 정권만 바뀌면 이것저것 뜯어고치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나라의 실정에 비추어 본다면 소규조수의 지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교훈을 주고 있다. 소하와 조참은 성숙된 정치인이다. 둘은 한 고조 유방의 개국공신들로서 서로 라이벌 관계였다. 그러나 서로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소하는 조참보다 능력이 뛰어나 먼저 재상이 되었다. 소하의 능력이 더 대단했다는 것은 유방이 이야기한 ‘사냥개와 사냥꾼’의 비유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논공행상의 자리에서 유방이 소하의 공을 일등으로 삼으려하자 주변의 신하들이 글과 붓으로 일관했을 뿐 전쟁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은 자에게 공을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유방은 “사냥에서 들짐승과 토끼를 쫓아가 죽이는 것은 사냥개이지만 개 줄을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은 사람이오. 지금 여러분들은 한갓 들짐승에게만 달려갈 수 있는 자들뿐이니, 공로는 마치 사냥개와 같소. 소하로 말하면 개의 줄을 놓아 방향을 알려주니 공로는 사냥꾼과 같소”라고 말해 주변의 군소리를 물리쳤다.

사실 유방은 내심 조참을 논공행상의 첫 번째로 두려고 했었다. 그러나 관내후關內候 악군鄂君이 소하의 공을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조참과 같은 사람 1백여명이 없다고 해서 한나라가 부족할 바는 없으니 “소하가 첫 번째이고, 조참이 두 번째입니다”라고 말하자 유방은 수긍하며 그의 뜻을 따랐다. 이로 볼 때 조참은 소하를 못마땅하게 여길만한데도 그런 내심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소하의 태도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며 상대를 비난하는 우리의 정치 세태와는 사뭇 다르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서 “그는 소하의 뒤를 이어 한나라의 상국이 되어 소하의 법을 그대로 따르고 바꾸거나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편안했다. 조참이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고 재능을 뽐내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 <조상국세가>를 지었다”고 했다. 사마천은 무엇보다도 조참의 겸손한 인품을 크게 평가한 것 같다. 유방이 조참의 공을 첫 번째로 치하하고 싶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조참은 황로사상(도교사상)을 받아들였기에 인위로 이것저것을 고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을 치세와 처세의 근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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