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45] 몸통은 깃털의 존재근거다!···이상득·홍인길·이인규의 경우

불을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관료주의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김영삼 정부 시절의 일이다.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 비서관이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1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기간 정치자금을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실제로 그 말의 진정성을 믿는 분위기는 아니어서 정권에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홍인길 수석을 찾았다고 한다. 홍인길 수석은 정치자금을 관리해서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과 청와대 여러 부서의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랬던 그가 한보사태로 덜컥 구속이 되자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서운한 마음으로 “내가 무슨 실세냐. 나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터럭에 불과하다”는 요지의 ‘깃털론’을 내세워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이때부터 ‘몸통론’과 ‘깃털론’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수 없다는 인과因果의 논리는 지극히 보편적인 상식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사태의 진실이 왜곡될 수 있다.

몸통이 누구냐는 의문은 한국사회의 낙후성을 반영하는 상징적인 질문으로, 권력형 비리가 터질 때마다 제기되고 있다. 2010년 MBC의 시사고발프로그램인 ‘PD수첩’에서 2008년 영화 ‘식코’를 패러디한 ‘쥐코’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는 이유로 국무총리실에서 조사를 받은 ‘KB 한마음’ 대표 김종익씨 사건을 다루었다. 이 사건으로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2008년 이후 공무원은 물론 민간인까지 지속적으로 사찰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불법 사찰의 범위는 민간인뿐만이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의 2선 후퇴를 요구한 한나라당의 남경필, 정두언, 정태근 의원은 물론 박근혜 대표와 친박계 의원들 그리고 친노무현 성향의 의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 사건에 청와대가 연관이 있는지의 여부였는데, 청와대가 ‘공직윤리지원관실’에 대포폰을 지급해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청와대가 ‘몸통’이라는 사실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사건의 파장이 청와대까지 미치자 당시 사찰을 주도했던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이 “조사 시작 두 달이 지나서야 민간인임을 알았다”는 상식에 어긋난 진술과 함께 “청와대 개입은 없고, 자료 삭제는 내가 지시했다. 몸통은 나다”라며 ‘청와대 배후 논란’에 선을 그었지만 대통령이 사찰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이 자신이 몸통이라고 했지만 진짜 몸통은 대통령이 아니냐는 세간의 의심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새의 몸통은 하나지만 그 새의 몸에는 수많은 깃털들이 있다. 본인은 깃털이지 몸통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깃털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몸통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몸통이 본질이고, 깃털은 현상이라는 것이다. 본질과 현상,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식별하는 통찰의 혜안이 있다면 몸통과 깃털의 소모적인 아우성은 그 시비가 분명해질 것이라고 본다. 몸통과 깃털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관계처럼 필연성에 의해 연결된 운명공동체다. 몸통은 깃털의 존재근거이며, 깃털은 몸통의 미적美的인 가치를 규정하는 기준이다.

혹리酷吏들의 몸통은 바로 군주

<사기>의 ‘혹리열전’은 12명의 포악한 관리들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12명의 혹리 중 10명이 한무제 때의 사람들이다. 한무제는 집권 초에 동중서董仲舒같은 유학자를 기용하여 중앙집권의 틀을 확고히 하였으나 말년에는 무리한 정복과 토목공사 그리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냈다. 한무제는 자신이 확립한 중앙집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농업기술의 개발을 통해 생산량을 확대하는 한편 소금과 철의 전매를 통해 국가의 유지에 필요한 세수를 확보했다. 세금을 걷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관료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법령을 세우고 그것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사회의 특권층임에는 분명하다.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근무하는 관리를 순리循吏라 하고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를 혹리酷吏라고 한다. 역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혹리들이다.

한무제 때 왕온서王溫舒라는 혹리가 있었다. 사마천은 그에 대해 “사람됨이 남에게 아첨하는 성격이라서 권세 있는 자는 잘 섬기고 권세 없는 자는 노예처럼 다뤘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한무제는 그를 유능한 인물로 평가해서 중용했다. 왕온서에게 잡힌 사람들은 고문으로 몸이 문드러져 감옥에서 죽었기에 판결을 받고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했기에 왕온서가 관할하는 지역은 감히 밤에 돌아다니는 자도 없었고, 도둑이 없어져 개 짖는 소리도 사라졌다고 한다. 왕온서의 통치로 그 지역은 질서가 유지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마천은 “왕온서의 발톱이나 어금니의 역할을 하는 관리들은 사람의 탈을 쓴 호랑이처럼 포악했다. 그가 중위로 있는 몇 해 동안에 그의 부하로서 직권을 이용하여 부를 쌓은 자가 많았다”고 했다. 이는 힘없는 백성들만 죽어나고 관리들만 배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리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막힌 구절이 있다. 즉 왕온서가 법의 이름으로 살인하던 중 봄이 되었다. (옛날에는 봄은 생기를 가져오는 계절이기에 일체의 살상을 금하였다.) 그러자 왕온서는 발을 구르며 탄식했다. ‘아! 겨울을 한 달만 더 연장한다면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을!’……천자(한무제)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유능하다고 여겨 중위로 승진시켰다._‘혹리열전’

사마천은 바로 이 한 줄을 통해 당시 최고 혹리의 ‘몸통’이 다름 아닌 천자임을 밝히고 있다. 이 어찌 자신에게 궁형의 치욕을 안긴 한무제에 대한 사마천의 절묘한 무언의 복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무제에게는 왕온서 같은 관료가 필요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왕온서의 품성보다 그의 혹독한 통치술이 한무제 자신에게는 더 중요했던 것이다. 한 때 왕온서는 황제의 뜻에 맞지 않은 의견을 제시해서 면직된 적이 있었다. 당시 한무제는 50장 높이의 통천대通天臺를 건설하려고 했으나 인력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 때 왕온서가 병역을 마치지 않고 달아나서 곳곳에 숨어있는 자들을 색출해서 통천대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 한무제는 기뻐하며 그를 다시 중용했다. 여기서 한무제는 분명 그의 혹독함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왜 그를 다시 기용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지 않을 수 없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