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完] 시대 앞서간 사마천이 우리 앞에 지금 나타난다면···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사)아시아기자협회 부이사장]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맺어져야 한다. ‘여자’라는 규정 속에 담긴 부당한 사회적 함의, 예를 들면 사회적인 일은 남자의 몫이고 가정일은 여자의 몫이라는 사회적 편견은 여자를 ‘인간’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수단으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의 전형이다.

사마천은 ‘여태후본기’에서 “고후가 여주인으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해 정치가 방 안을 벗어나지 않았어도 천하는 편했다. 형벌이 드물게 사용되어 죄인이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니 옷과 음식이 더더욱 풍족해졌다”는 말로 시대의 악녀로 알려진 여태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아시다시피 여태후는 유방의 애첩이었던 척희의 사지를 자르고 눈과 귀를 멀게 하여 돼지우리에 던져 넣는, 이른바 ‘사람돼지人豚’의 형벌을 내린 잔혹한 인물이다.

사마천은 여태후의 그러한 폭정을 비판하면서도 그녀가 나라를 안정되게 한 것은 사실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사마천이 여자를 ‘새벽의 암탉’이라고 여겼다면 ‘본기’에 올려 그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혜제를 왕으로 내세워 섭정을 했던 여태후를 제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에 올린 일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이는 혜제가 왕이었지만 실질적인 왕은 여태후였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여자란 남자의 부속물이라 여겨지던 시대에 여자를 인간 그 자체로 평가했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여성관은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다. 절반의 남자가 절반의 여자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억죄는 것은 평등의 이치를 벗어나는 일이다.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은 여성을 남자의 소유물로 여기는 전근대적인 생각이다. 다행이 요즘에는 남성우월주의적인 태도가 많이 완화되었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소리 없이 작용하고 있다.

특히 일부 청소년들이 남성의 돈을 밝히거나 남자를 통해 신분상승을 하려는 여자들의 모습을 ‘김치녀’라고 명명하여 비하하거나, 성형괴물이라는 뜻의 ‘성괴’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남발하여 여성들에 대한 협오감을 부추기고 있어 심히 우려된다.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갈 세대들이 여성에 대한 비하를 서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 되리라는 염려를 지울 수 없다.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읊었다. 상대방을 ‘호명呼名’하는 일이 바로 관계의 본질이다. 자신이 ‘꽃’이라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상대방을 알아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꽃’이라고 정확히 호명하는 일이다. 상대를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양나라 효왕의 문객이던 추양은 주변의 시샘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추양은 자신이 나쁜 이름을 남기고 죽게 될까 두려워 옥중에서 효왕에게 편지를 썼다. 진실한 사람은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그런 말은 한갓 빈말에 지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추양의 편지에는 “젊었을 때부터 흰머리가 되도록 사귀었으면서도 새로 사귄 것 같은 자가 있는가 하면, 비를 피하기 위해서 우연히 만나 잠시 우산을 함께 쓰면서 짧은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도 옛날부터 사귄 것 같은 사람이 있다”는 속담이 인용되고 있다. 경개傾蓋란 우산을 기울여 받쳐 준다는 의미다. 아무리 오랜 친구라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관계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속담을 인용한 이유는 충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간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효왕의 모습을 꼬집기 위해서다. 편지 말미에 추양은 “어진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고 풍속을 바로 잡을 때는 도공이 녹로로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교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천박하고 현란한 말에 이끌리거나 사람들의 떠도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통해 간신들의 말장난에 넘어가지 말 것을 권했다.

효왕은 충신을 제대로 호명하지 못했다. 뒤늦게나마 추양의 편지를 읽고 그를 풀어주고 다시 상객上客으로 삼기는 했지만 사후약방문격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 사람의 진정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모든 관계의 바른 도리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시구처럼 사는 게 참다운 삶이 아닐까?(끝)

*그동안 이석연 전 법제처장의 [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을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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