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②] ‘보신적 이기주의’ 전형 세월호 선장 이준석
사마천이 본 도구적 인간과 악의 평범성_왕온서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한나라 무제 때 왕온서라는 혹리酷吏도 ‘보신적 이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사마천은 「혹리열전」에서 “그는 젊었을 때 다른 사람의 무덤을 도굴하는 등 간악한 짓을 했다. 그 뒤 현의 정장亭長으로 임명되었지만, 취임과 해임을 여러 차례 거듭했다”는 객관적인 서술을 통해 그의 성품이 어떤지를 묘사했다.
왕온서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비윤리적인 인물이다. 정장이 되어서도 취임과 해임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의 간악한 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온서와 같은 인물은 타인을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실현해줄 수단으로 여기는 게 특징이다. 왕온서는 승진하여 광평군廣平郡의 도위가 되었을 때 자신의 일을 맡길만한 관리 10명을 뽑아 심복으로 삼았다. 그는 뒷조사를 통해 심복으로 삼은 자들의 중죄를 파악한 뒤 그것을 빌미로 도적들을 살피는 일을 맡겼다.
왕온서는 도둑을 잡아들여 자신을 만족시킨 심복은 처벌하지 않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과거에 저지른 일을 문제 삼아 죽이는 것은 물론 그들의 일족들까지 죽인다.
사람의 약점을 잡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드는 비열한 행태는 하내군 태수로 임명이 되었을 때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왕온서는 심복을 통해 하내군의 호족들 가운데 교활한 자들의 명단을 확보한 뒤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아주 교활한 자는 일족을 멸하고, 그에 못 미치는 자들은 당사자만 사형시키겠다고 했다. 상소문을 올린 지 이삼일도 되지 않아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고, 왕온서는 관련자들을 모두 처벌했다. 당시 처형된 자들의 피가 십여리까지 흘렀다고 하니 그 참상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왕온서가 도적들과 교활한 관리들을 처형한 것은 정의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행동함에 있어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인물이었다. 결과만 놓고 볼 때 왕온서의 통치는 신속하고 바른 것이었기에 한무제로부터 치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는 지대한 원망을 받았다. 사마천도 그에 대해 “왕온서는 사람됨이 남에게 아첨하는 성격이라서 권세 있는 자는 잘 섬기고 권세가 없는 자는 노예처럼 다루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사마천은 그의 행동이 오로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왕온서는 하내군 태수로 재직하면서 도적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아! 겨울을 한 달만 늦출 수 있다면 나는 일을 만족스럽게 처리했을 텐데!”라고 한탄을 한다. 당시에는 입춘이 지나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봄은 생기를 가져오는 계절이기 때문에 살상을 금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마도 농사가 시작되는 기간이라서 노동력의 확보라는 차원에서도 그리 한 것 같다.
겨울을 한 달만 늦추면 도둑들을 더 잡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왕온서의 한탄은 권력자에 대한 아부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그가 살상을 하여 위세를 부리기를 좋아하며 백성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이와 같다”고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무제가 왕온서를 중위로 승진시켰다. 이로써 왕온서의 모든 행적의 몸통은 결국 황제였고, 그의 행위는 도구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