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46] 통치근본은 혹독한 법령 아닌 국민 신뢰와 지도자 도덕성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한무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시켜줄 혹리라는 깃털들이 필요했다. 왕온서는 한무제가 필요로 하는 깃털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내치고, 때에 따라서는 기용하는 용인술用人術을 구사한 거다. 왕온서는 주변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고발로 인해 위태로움을 느끼자 결국에는 자살을 했다. 왕온서와 같은 관리는 지금 우리 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혹리들의 몸통은 바로 그들이 떠받들고 있는 군주다.

한무제는 가혹한 조치로 질서를 세우는 것이 국가 경영의 기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혹리열전’에서 거론한 대다수의 혹리들이 그의 시대를 보조했던 사람들이다. 사마천은 ‘혹리열전’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령은 다스림의 도구일 뿐 백성들의 맑고 탁함을 다스리는 근원은 아니다. 옛날(진)에는 천하의 법망이 치밀했으나,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나 극도에 이르러 법에 저촉시키려는 관리들과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백성들의 혼란은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당시 관리들은 불을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것처럼 정치를 조급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하고 준엄하며 혹독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 임무를 즐겁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도덕을 말하는 사람들 역시 자기가 맡은 일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한나라가 일어나자 모난 것을 깨뜨려 둥글게 만들고, 조각한 장식을 깎아 소박하게 만들었으며, 법망은 배를 집어 삼킬 만한 큰 물고기도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너그럽게 했다. 그렇게 하니 관리들의 통치는 순수하고 단순하여 간악한 데로 빠지지 않았고, 백성들은 잘 다스려지는 데에 편안함을 느꼈다. 이상으로 살펴보면,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은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에 있다._「혹리열전」

통치의 근본은 혹독한 법령이 아니라 도덕에 있다는 것이 사마천의 생각이다. 규제하려는 것이 많으면 편법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법이 너그럽다면 관리들의 통치는 단순해지고, 통치가 단순해지면 백성들이 편안해진다는 논리는 어찌 보면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견해라 할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선善의 통치로는, 즉 도덕과 같은 물렁한 통치이념으로는 권력을 지킬 수 없다고 했다. 사자와 같은 용맹함과 여우같은 교활함이 군주의 덕목이라 했던 이유도 그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그는 “통치자가 백성을 이끌려면 존경의 대상이 되거나 공포의 대상이 되어라. 존경을 받기 어렵거든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되라”고 했다. 마키아벨리의 말은 군주의 입장을 생각해서 한 말이지 백성들의 처지를 고려해서 한 말은 아니다. 즉, 통치자가 계속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면 존경을 받든지 공포의 대상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통치자가 존경이나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통치자 개인의 덕성에 의해 결정되는 면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거느리고 있는 관료들에 의해 판가름난다. 통치자의 성품이 어질다 해도 그를 보필하는 관료들이 혹독하면 그의 명성은 초라해진다. 통치자의 성품이 포악하더라도 그 밑에 있는 관료들이 강직하면 백성들은 그 왕을 존경하게 된다. 마키아벨리도 군주의 기질은 그 부하를 보면 안다고 했다. 그러므로 군주의 덕망은 관료에 의해 결정이 된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사마천은 말한다. “그 군주를 모르겠거든 그가 기용하고 있는 사람(신하)를 보라.不知其君 視其所使” 천고에 남을 명언이다. 국가나 조직에 있어서 인사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법령이 늘어날수록 도둑은 많아진다!

사마천이 ‘혹리열전’을 기술하면서 “법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바로잡으면, 백성들은 형벌을 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바로잡으면 부끄러움을 알고 바르게 살아간다”는 공자의 말과 함께 “상덕上德은 덕을 의식하지 않으므로 덕을 지니게 되고, 하덕下德은 덕을 잃으려 하지 않으므로 덕을 지니지 못한다. 법령이 늘어날수록 도둑은 많아진다”는 노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관료들의 통치 자세를 거론하기 위해서였다. 혹리의 반대편에는 순리循吏가 있다. 법령과 형벌로 백성을 옥죄는 혹리들과는 달리 순리들은 덕과 예로 백성의 삶을 보살핀다. 사마천은 ‘순리열전’에서 말한다.

법령이란 백성을 교화시키고 선도하기 위해 있는 것이며, 형벌이란 간사하고 악한 짓을 금지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문文:법령과 무武:형벌가 갖추어져 있지 않을 때, 선량한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품행을 단정히 하는 것은, 관리가 법 집행을 혼란스럽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직분을 다하고 법을 지키면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데, 어찌 위엄이 필요하겠는가?_「순리열전」

관리가 법 집행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법령과 형벌이 구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품행이 단정해진다는 것이 사마천의 설명이다. 사마천의 설명은 법령과 형벌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백성의 교화와 선도를 위해, 간악한 행위를 금지하기 위해 법령과 형벌은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관리들이 자신의 직분을 다하지 않았을 때다. 스스로 법 집행의 모범이 되지 못하면서 오히려 권위로써 백성들을 다스린다면 법령과 형벌의 기강은 혼란해지기 마련이다. ‘관료주의’란 바로 그러한 폐해를 지적하는 것이다.

사전辭典에 의하면 관료주의란 “관료 정치 아래에 있는 관청이나 사회 집단에서 흔히 나타나는 독특한 행동 양식이나 의식 상태를 비판적으로 이르는 말. 상급자에게는 약하고 하급자에게는 힘을 내세우려 하며, 자기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독선적인 행동이나 의식을 보이는 따위의 특성을 이른다”고 정의되어 있다.

한무제 때 혹리 중의 한 사람인 왕온서의 행적과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정의다. 공무원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있는 이유는 공무원들이 관료주의에 매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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