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49] 대한민국 청춘들에게 ‘화식열전’ 일독을 권하는 이유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 <사마천 한국견문록> 저자] 사마천의 <화식열전>은 춘추시대 말부터 한나라 초까지 상업을 통해 부를 일군 사람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화식貨殖’이란 재물을 불리는 것을 뜻한다. 사마천은 사람이 부를 축적하는 것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조정에서 모든 힘을 다하여 계책을 내고 입론立論하며 건의하는 현인들과 죽음으로써 신의를 지키면서 동굴 속에 은거하는 선비들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모두 재부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청렴한 관리도 관직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부유해지고, 탐욕스럽지 않은 상인도 결국 부유해지는 법이다. 부라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므로 배우지 않고도 모두 이루고자 하는 바이다.” <화식열전>
인간의 모든 행동은 결국엔 부로 귀착이 된다는 사마천의 견해를 자칫 속물주의적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에 대한 욕망은 누구나 갖고 있는 본성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선비가 명성을 얻으려는 것도, 강도가 사람을 해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다 부를 위한 것이라는 사마천의 주장은 돈이 인생의 전부라는 속물주의적인 견해를 피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에서 나온 철학적인 전제前提다.
니체도 말했듯이 정당한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부를 증식시키려는 정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부를 늘리는 행위를 비천한 것이라 여기며 입으로만 도덕을 운운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마천은 아주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신의 안전을 해치지 않고도 능히 향유할 수 있는 재부를 얻을 수 있다면 현인들도 노력하여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농업으로 부를 이룬 것을 최상급이라 하고, 상공업으로 부를 이룬 것을 그다음 등급이라 하며, 강탈이나 사기로 치부한 것을 최하등으로 삼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숨어사는 선비의 청고淸高한 품행도 없으면서 시종 가난하고 비천하며 그러면서도 고준담론을 하기를 좋아하고 무슨 인의도덕을 계속 운위하는 것은 역시 진실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화식열전>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이란 비천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면서 집안에 앉아 책만 읽으면서 가족의 생계는 나 몰라라 하는 선비의 행동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운 것이라는 게 사마천의 생각이다. 부연하자면, 부를 축적하는 일이 정녕 못마땅한 것이라면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게 낫지 굳이 가족과 함께 살면서 서로를 위태롭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선비의 청고한 행동無巖處奇士之行’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 듯하다. 물론 ‘청고한’이라는 주관적인 표현을 가미하기는 했지만 홀로 세속과 떨어져 사는 것이 입으로만 인의仁義를 따지며 궁핍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훨씬 당당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인 듯하다.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은 자공子貢의 경제력 때문이다. 현실의 무능력이란 것은 어떠한 변명으로라도 결코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집안이 빈곤하고 부모가 늙었으며 처자가 약하고 어리며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제사 음식도 장만하지 못하고, 음식과 의복도 자급하지 못하면서도 아직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그것은 진실로 비유조차 할 수 없다.” <화식열전>
무능력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할 곳이 없을 만큼 못난 사람이라는 말이 참으로 통렬하다.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점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가난 그 자체는 결코 불명예스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태만과 방종, 사치, 우둔함의 결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불명예가 된다”고 말한다. 가족이 굶주릴 만큼의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태만이며 방기放棄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자공이 공자를 모시고 다니며 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부유한 대상인이다. 그가 사두마차를 타고 가마행렬을 거느리고 제후들을 찾아가면 왕들이 몸소 뜰까지 내려와 예로 맞이하였다. 사실 공자의 14년 간의 망명생활도 자공의 상권商圈이 미치지 않는 곳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공자 사후 자공이 사재를 털어 학단을 만들고 그 학단의 집단적 연구 성과가 <논어>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공의 경제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