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58] 수도이전 반대 헌법소원과 추사의 ‘세한도’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사)아시아기자협회 부이사장] ‘확연’이라는 단어가 있다. 정태혁 동국대 명예교수는 <대도무문>이라는 책에서 “확연이라는 것은 마치 가을 하늘같이 구름 한 점도 없고 맑고 깨끗하고 밝은 경지요, 넓고 휑하게 비어 있으면서도 만물이 가득히 생동하는 경지다”라고 풀어 말했다. 국어사전에는 ‘넓게 텅 비어있다’라고 간략하게 나왔지만 그 뜻을 깊게 탐구하여 삶의 전반을 꿰뚫는 지혜의 보고로 활용하도록 만든 사람이 달마대사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의 숲은 울창하고 빽빽하여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가을이 와서 잎들이 마르고 낙엽이 지면 그 안에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면면히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한 변화는 시비의 세계를 떠난 자연의 순리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자연에 비유한다면 젊고 활기찰 때에는 각기의 정열과 야망으로 우거진 여름 숲처럼 보이고, 나이가 들면 가을과 겨울의 숲처럼 휑하니 자신의 본질만 드러내게 되어 여유롭고 고적한 인생의 모습이 보인다. 단순해지고 확연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자연의 흐름과 인간 삶을 진실하게 만드는 요체다.

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마음이 심란할 때는 세한도를 보면서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세한도에는 사마천의 <사기>의 정신이 녹아있기 때문아다. 세한도를 보면 확연해진다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절감한다. 알려지다시피 추사의 세한도는 절해고도 제주에 유배된 자신에게 중국에서 수집한 귀중한 자료와 서책을 험난한 뱃길을 마다하지 않고 친히 전해준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지금이야 교통수단이 편리해 제주도에 가는 것이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당시만 해도 목숨을 건 여행길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승을 대하는 제자의 그 뜻과 마음이 이렇게 애절하고 깊을 수 있다니, 라는 생각을 하니 절로 가슴이 뭉클하다.

세한도의 제작의도가 제자의 정성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 하지만 그보다도 세한도 자체가 표출하는 고절孤節한 정서가 더더욱 마음에 깊게 다가오는 이유는 지조와 절개를 목숨처럼 여기는 확연한 기상이 그림 전체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네 그루의 청송과 동그란 창이 나있는 토담집 그리고 꽉 차인 듯 절묘하게 비어있는 여백의 풍경은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치열하게 인생을 견뎌온 추사의 기품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추사의 성정과 기품이 어떠한지는 세한도의 발문을 보면 능히 알 수 있다.

공자가 <논어> ‘자한편’(子罕篇)에서 이르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고 하였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 것이라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결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요,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이지만, 성인은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에 이를 일컬었네.”

사학자 이병도는 “그림 속에 시가 있고 도가 스며 정이 넘실거린다. 이는 높고 깊은 학문과 남다른 견문과 타고난 대수大手가 아니고는 다다르지 못할 절경이다”라고 했다.

추사의 집안은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었다.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부마로 99칸의 저택과 토지를 하사 받았고,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은 판서를 지낸 가문이었으니 그 위세가 대단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추사는 어려서부터 출중한 능력을 보였다. 일곱 살 때 입춘첩을 써서 대문에 붙였는데 그것을 본 채제공蔡濟恭이 놀라 그의 집을 방문해서 아버지 김노경에게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이름을 날리겠지만, 그러나 만약 글씨로 출세를 하면 팔자가 사나울 것이니,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는 것이 낫겠소이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은 세상의 시기를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혼탁한 시절일수록 더욱 그렇다.

추사가 살던 시대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세력이 이전투구를 하는 난세였다. 추사 집안은 안동 김씨였지만 안동 김씨로부터 탐탁지 않은 대우를 받아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김씨 세력의 모략과 상소로 아버지는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되었고,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추사는 권세와 이익으로 야합하는 세태의 추악한 몰골을 목도한다. 이후 추사는 선학禪學과 예술을 통해 난세의 삶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고귀한 경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한 추사의 삶에 비추어보면 이상적의 곧은 정성과 한결같은 의리는 감동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상적이 추사에 대해 가졌던 마음은 ‘일심一心’의 의리다. 이상적의 그 뜻을 가상히 여겼기에 추사는 세한도라는 명작을 제자에게 헌사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스승의 마음을 읽은 이상적은 추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익을 좇지 않고 도도한 세상 풍조 속에서 스스로 초연히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변변치 못한 작은 정성으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그랬던 것일 뿐입니다”라고 겸손히 답을 하였다. 술수와 음모가 난무하고, 배신이 성공의 당연한 기술처럼 여겨지는 우리의 세태가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직언하는 자의 불편함을 나는 2004년 수도 이전을 저지하기 위한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위헌 결정을 받을 때 경험했다. 이때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반대세력의 정치 공세”라는 주장을 펼쳤고, 나를 한나라당, 조선일보, 동아일보, 헌법재판소와 함께 ‘오적五賊’으로 지목했다. 또한 보수진영 일각에서는 감히 나서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였다. 나의 행동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수도 이전이 헌법이 정한 국민적 의견수렴 과정 없이, 즉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결행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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