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63] 살인자 ‘김은애’를 정조 임금은 왜 사면했을까?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사)아시아기자협회 부이사장]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의 시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에 실린 ‘은애전’(銀愛傳)은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살인을 하게 된 김은애金銀愛라는 여인의 행적과 곡식을 훔쳤다는 이유로 동생을 폭행에 중상을 입힌 형을 나무라다 우연치 않게 그 형을 죽게 한 신여척申汝倜의 사연을 말미에 기록하고 있다. 정조가 옥사獄事 관련 서류를 검토하다가 김은애와 신여척申汝倜의 사연을 보고 그들을 사면해주면서 왜 두 사람을 살려야 하는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덕무에게 전傳을 짓도록 명했다.

김은애는 전라도 강진현에 살았는데, 그 마을에는 안씨 성을 가진 고약한 노파가 함께 살고 있었다. 노파는 창기 출신으로 성질이 음험하고 사특하였으며, 온 몸에 개창(옴)을 앓고 있었다. 노파는 김은애의 어머니에게 곡식을 구걸하며 살았는데, 은애의 모친이 때로 곡식을 주지 않자 이에 앙심을 품고 김은애를 음해하는 계략을 꾸몄다. 노파는 남편의 누이의 손자인 최정련에게 김은애와 결혼하게 해 줄 테니 마을 사람들에게 네가 이미 은애와 사통을 했다고 소문을 내라고 시켰다. 소문이 퍼지자 김은애는 시집을 갈 수 없게 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다행이 김양준이라는 남자가 사정의 전후를 명백히 알고 있어 그녀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노파의 음해가 계속되자 김은애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노파를 죽이고 말았다. 이덕무는 김은애가 노파를 죽이는 장면을 아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마치 독자가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칼을 든 김은애가 ‘눈썹과 눈을 거꾸로 세우고’ 노파에게 “이 칼 맛을 보라”고 하자 이에 맞서 노파가 “찌를 테면 찔러보라”며 배짱을 보이자 “여러 말 할 것 없다”며 은애가 노파의 좌측 목을 찌르는 장면과 칼을 맞고도 살아난 노파가 은애의 팔뚝을 잡고 덤비자 다시 은애가 노파의 우측 목과 겨드랑이, 팔, 젖을 찌르는 장면은 독자의 등골을 오싹하게 할 정도로 치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김은애는 노파를 살해한 후 최정련을 찾아가 복수를 하려고 했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관가에 끌려갔다. 왜 노파를 참혹하게 죽였냐는 관원의 질문에 “처녀가 무고를 당하면 더럽히지 않아도 더럽힌 것 같습니다. 노파는 본래 창기인데 감히 처녀를 무고하니 고금 천하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김은애는 자신이 노파를 죽였기에 그 죗값으로 당연히 죽게 되겠지만 아쉽게도 노파와 함께 자신을 무고한 최정련에 대한 복수를 하지 못했으니 이제 관가에서 나 대신 최정련을 처벌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사건의 전후를 들은 정조는 김은애를 불쌍히 여겨 대신들에게 그녀를 살릴 방도에 대해 의논할 것을 명했다. 이에 채제공蔡濟恭이 “은애가 원한을 갚은 것이 지극히 원통한 데서 나왔으나 살인죄를 범하였으니 신은 감히 용서하는 의논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김은애를 변론했다.

정조 있는 여성이 음란하다는 무고를 당한 일은 천하의 지극히 원통한 일이다. 은애의 지조와 절개로 한 번 죽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도리어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한갓 죽기만 하면 사정을 아는 이가 없을 것을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을 쥐고 원수를 죽여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은 죄가 없고 저 노파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한 것이다. 은애와 같은 사람이 열국列國의 세상에 났다면, 그 자취는 비록 다르나 장차 섭영?榮과 이름을 가지런히 할 것이다. 태사씨太史氏도 전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_「은애전」

정조는 김은애를 섭정의 누이인 섭영과 대등하게 비교하면서 김은애와 같은 여인이 열국에서 태어났다면 사마천도 분명히 김은애에 대한 열전을 지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덕무는 김은애의 사연을 사실에 근거해 정리하면서 마지막에 “은애를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풍교風敎를 세우겠는가?”라는 정조의 말을 인용해 <은애전>을 짓게 된 뜻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김은애가 사람을 죽인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정조貞操를 지키는 일은 여인으로서의 자존을 지키는 일인데 그 심사를 자세히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법대로 처리한다면 백성들의 억울함을 어찌 살필 수 있겠냐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고, 그러한 취지를 이덕무가 <은애전>을 통해 소상히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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