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39] 우리시대 ‘순리’와 ‘혹리’는 누구인가?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법지불행 자상범야”(法之不行 自上犯也, 법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어기기 때문이다)
공자는 국가의 구성요소를 군사력, 경제력, 사회적 신뢰라고 하면서 그중 사회적 신뢰를 가장 중시했다. 법치 열외 내지 예외주의, 적법절차를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법치 불감증 내지 목표지상주의가 일부 사회지도층, 고위공직자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것을 느끼곤 한다. 사마천은 <상군열전>에서 법치를 확립한 진秦나라의 개혁가 상앙商?의 입을 빌어 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은 윗사람부터 법을 위반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윗사람들의 행실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행되지만 윗사람들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진 효공이 법가인 상앙을 등용하고 법령을 정비 할 때의 상황을 상군열전에서 들여다 보자.
새 법령은 제정되었으나, 아직 공포는 하지 않았다. 백성이 신임하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리하여 높이가 세 발 되는 나무를 성중의 남문에다 세우고 글을 써 알리기를, ‘이 나무를 북문에다 옮겨 놓는 자에게는 10금金을 준다.’고 사람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이상하게만 여기고 옮기려는 자가 없으므로 다시 광고하기를 ‘이 나무를 북문에다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준다.’고 하였다. 어떤 자가 이것을 옮겼으므로, 얼른 50금을 주었다.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알린 다음에, 마침내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법령이 시행되자, 백성들은 도성으로 몰려와 그것의 불편함을 고하는 자가 수천이 되었다. 그러다가 태자가 법을 범했다. 상앙은 ‘법이 잘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 있는 자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法之不行 自上犯也’ 하고 태자를 처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다음 임금이 될 사람이므로 형벌에 처하기는 난처한 일이라고 하여, 그 대신 태자의 스승을 처벌하였다. 다음 날부터 백성들은 모두 법을 지켰다. 법을 시행한 지 10년에 진나라의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고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도 집는 사람이 없었다. 산중에는 도둑이 없어졌고, 집집마다 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다 족하였으며, 백성은 전쟁에 용감하고 개인의 싸움에는 힘쓰지 않았으며, 국내의 행정은 잘 다스려졌다. 일찍이 법령의 불편을 말한 자 중에 이번에는 법령의 편리함을 말하러 온 자가 있었다. 상앙은 ‘이런 자 역시 다 선도감화先導感化를 어지럽히는 백성이다.’ 하여 모두 변방의 성으로 쫓아 버렸다. 이후 진나라 백성들은 감히 법에 대해 의론議論하지 못했다._상군열전
이처럼 상앙은 법을 너무 엄격하게 시행함으로써 많은 적을 만들었다. 진 효공이 죽자 태자가 뒤를 이었고 세상은 바뀌었다. 그러자 상앙은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게 되어 이웃나라로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상앙은 달아나다 국경 근방까지 와서 객사에 들려고 하였다. 객사의 주인은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말한다. “상군商君의 법률에는 여행증이 없는 손님을 재우면 그 손님과 연좌로 죄를 받게 됩니다.” 연좌제는 상앙 때부터 생겨난 제도다.
“아! 신법의 폐단은 마침내 내 몸에까지 미쳤는가?” 결국 상앙은 체포되어 전 가족과 더불어 몰살됨으로써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만다. 개혁은 예나 지금이나 지난한 과제이고 때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史實을 엿볼 수 있다. 어떻든 상앙은 법집행의 형평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법치의 핵심을 확립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법가사상에 기반을 둔 엄격한 법치확립이 후일 진나라 천하통일의 기반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상앙에 대하여 상당히 인색한 평가를 하고 있다. “상군은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그가 당초에 제왕의 도로써 효공의 신임을 얻었던 일을 관찰해 보면 뿌리가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고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한 것이지 그가 본래 가지고 있는 자질이 아니었다.”
황제도 백성과 똑같이 법을 지켜야
사마천은 <순리열전>과 <혹리역전>에서 법집행관, 사법관 등 법조인 관료들을 다루고 있다. 또한 <장석지 풍당열전>에서는 장석지라는 인물을 통해 법과 정치, 법적용의 일관성과 공정성 등의 문제를 정면으로서 거론하고 있다. 지금부터 2100년 전 절대군주제에서 하에서의 일이다. 장석지는 서한시대 가장 명망 높은 사법 관료로서 최고 사법관인 정위(오늘날의 대법원장)를 지낸 사람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서한의 3대황제 문제가 외출 중 위교渭橋를 지나는데 갑자기 다리 아래에서 사람이 튀어나와 문제가 탄 말을 놀라게 했다. 대노한 황제는 그자를 장석지에게 넘겨 죄를 다스리게 했다. 사건을 심리한 장석지는 이 자가 어가를 피하려고 다리 밑에 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참 뒤 어가가 통과했거니 생각하고는 다리 밑에서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어가를 만난 것이다. 장석지는 법률 규정에 따라 이 자에게 4량의 벌금을 물렸다. 그리고 사건을 마무리 짓고는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문제는 처벌이 너무 가볍다며 장석지를 심하게 꾸짖었다. 이에 장석지는 차분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법은 폐하께서 제정하셨지만 천하 사람들과 함께 준수해야 합니다. 분명히 지금 법률에 이런 죄는 벌금형에 처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이런 점은 무시하고 임의대로 가중 처벌하려고 하십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그 자를 잡아 목을 베셨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그 일을 사법기관에 넘겨 처리하게 하신 이상 사법기관의 의견을 존중하셔야 합니다. 정위는 법 집행의 본보기이기 때문에 법 집행이 공정하지 못하면 천하의 모든 법관들이 그대로 따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어찌 할 바를 몰라 원성만 가득 찰 것입니다.” <장석지 풍당열전>
문제는 마음이 언짢았지만 장석지의 뜻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법은 비록 황제가 제정하였지만 황제라도 일반 백성들과 동일하게 그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장석지의 외침이 지금도 귓전에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