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40] 헌재·법원·국회는 안 지키고 국민한테만 법 지키라는 나라
법치주의는 쌍방통행이어야 한다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나에게는 고시공부를 할 때부터 지금까지도 선뜻 이해가 안 가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법률규정이 있다. 똑같이 기간을 준수하라는 규정인데 법원이나 행정부 등에 대해서 규정한 것은 이를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국민에게 요구한 것은 하루만 늦어도 가차 없이 권리행사의 기회를 박탈하는 제도다.
예컨대 헌법재판소법 38조나 민사소송법 199조 등에 보면 헌법재판소는 헌법소원을 접수한 날로부터 180일 이내에 종국결정의 선고를 하여야 한다. 또 법원은 소송이 제기된 날로부터 5월 이내에 선고를 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180일, 5개월 등은 법리상 훈시규정으로서 이를 지키지 않더라도 부적법한 것이 아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운용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소송을 제기한 국민 입장에서는 제때 판결이 선고되어 신속한 권리구제를 받는 것이 절실히 요청됨에도 판결선고 기간을 훨씬 넘어서 심지어 몇 년이 지나서 선고하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국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헌법 제54조는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안을 의결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 기간을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예는 행정부, 법원, 국회 등 관련 법률에 많이 있다. 반면 행정소송 등은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또는 행정청의 잘못된 처분이 있음을 안 날로부터 각각 90일 이내에 제기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우 90일의 기간은 법리상 이른바 효력규정으로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하루만 늦어도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으로 운용하고 있다.
똑같이 일정한 기간 내에 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어느 경우는 훈시규정이므로 이를 지키지 않아도 되고 어느 경우는 효력규정이기 때문에 지키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공권력의 주체(법원 등)가 하도록 하고 있다. 사실 국민들은 훈시규정이니 효력규정이니 하는 말장난 같은 법리法理에는 별관심이 없고, 똑같은 기간(날짜)을 상대방인 국민들에게만 불리하게 해석하는 권력기관의 횡포를 이해할 수 없다는데 있다.
이처럼 권력을 행사하는 측에서는 지키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나 책임이 따르지 않고 반면 상대방인 국민에게만 준수를 요구하는 제도나 법의 운용은 고쳐져야 한다. 법치주의는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안된다. 국민에게만, 약자에게만 일방적으로 준법을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가 아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측에서도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고 잘못된 법 집행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법치주의는 국민과 국가기관 모두가 준수하는 쌍방통행이 될 때 비로소 공정한 사회의 토대가 된다.
우리 주변에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그룹, 소외계층 등이 많다. 우리 헌법은 이 분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사회보장 등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국가의 배려는 정부의 시혜적 차원이 아닌 국민의 기본권리이자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사회적 약자의 눈물과 한숨을 담아내지 못하는 법은 제대로 된 법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실정법을 어기면서까지 불법행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도록 하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법제는 제쳐 둔 채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만 엄격한 법집행을 요구하는 것 역시 헌법의 정신과 정의관념에 부합하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입법가)이자 철학자인 솔론은 피해를 입지 않는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할 때 정의는 실현된다고 했다. 이어 솔론은 자신을 방문한 현자 아나카르시스와의 대화에서 만고의 명언을 남겼다.
“내가 법을 만드는 것은 법은 위반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일세.”(솔론)
“모르는 소리 마시오. 법률은 거미줄과 같습니다. 약한 놈이 걸리면 꼼짝 못하지만, 힘이 세고 재물을 가진 놈이 걸리면 줄을 찢고 달아나 버립니다.”(아나카르시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솔론전)>에 나오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