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발간 100주년①] 헤르만 헤세를 기억한다-험한 세상 살아내는 부드러운 힘
금년은 헤르만 헤세의 불후의 명작 <데미안>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 중반까지 85년 동안 살며 58년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상재했던 헤세와 그의 대표작 <데미안>. 헤세의 작품 중에서도 <데미안>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세계 문학사의 변곡점적 성장소설이자 시대소설을 기리고자 사회명사 58인이 헤세문학을 긴급소환했다. 바로 명사 58인이 쓴 <내 삶에 스며든 헤세>(강은교 외 지음 | 전찬일 기획 | 라운더바우트 | 500쪽)이다. <아시아엔>은 이들 명사의 데미안을 몇 차례에 걸쳐 싣는다. 멋진 기획을 한 전찬일 <아시아엔> 문화전문기자와 좋은 책을 낸 라운더바우트와 최희영 발행인에게 감사드린다. <편집자>
[아시아엔=김주연 문학평론가, 예술원 회원]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헤르만 헤세야말로 196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독자를 지닌, 이른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닌가 싶다. 왜 세계의 독자들은 그의 책을 읽고, 그의 책을 사며 열광하는가. 1900년대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수레바퀴 아래서>),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여서 ‘1960년대 이후’라는 나의 단서가 조금 뜬금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이다. 특히 많은 한국 애독자들을 갖고 있는 소설 <데미안>이 벌써 1919년 발표작이라는 걸 상기할 때 이런 현상은 다소 특별한 설명이 요구되는 현실이다.
그렇다. 그는 1960년대 이전, 그러니까 노벨문학상을 받은 1946년 전후는 물론 1950년대까지 그렇게 대중적으로 부각된 작가는 아니었다. 특히 그가 태어난 조국 독일에서는 오히려 조금쯤 낯선 시인, 낯선 소설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독일인은 그를 잘 몰랐고, 알았다고 해도 적잖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헤세는 독일에서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군 입대 대신 평화를 호소하다가 조국을 배신한 자로 매도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헤세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어느 두메산골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했고, 세상의 중심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었다.
이즈음의 실상을 그는 ‘짤막한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1915년 어느 날 나는 이러한 비참한 느낌을 공표하고 말았다. 그것은 소위 정신적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도 증오심을 조장하고, 허위를 선전하고, 엄청난 재난을 찬양할 줄밖에 모르니 유감이라는 내용이었다.
상당히 부드럽게 표현한 이 호소의 결과로 나는 내 조국의 신문 지상에 반역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나로서는 뜻밖의 체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문사와 많은 접촉을 해왔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비난하는 자의 입장이 되어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공격하는 기사는 내 고향의 20개 신문에 모두 게재되었다.”
대체 헤세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마치 축복을 찾은 듯한 작가들의 기고나 교수들의 격려문, 서재에서 쓴 유명 시인들의 전쟁 시를 읽게 될 때 갖는 비참한 느낌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 외에 그가 한 일은 없었다. 위대한 시대의 기쁨에 공감할 수 없었던 헤세는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독일 내에서는 잊혀진, 혹은 폄하한 자리에 머문 작가였다. 당연히 안 팔리는 작가에 속했다.
1946년 노벨상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도 많은 독일 국민은 시큰둥했고, 대학(대학원 포함)에서도 1960년대 이전까지 관심과 연구의 눈길을 받지 못했다. 그 헤세가 1960년대에 들어와, 더 정확하게는 1968년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가 유럽과 미국을 휩쓸며 갑자기 폭발했다. 이 시기에 프랑스 파리와 독일의 베를린, 미국의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는 세기를 바꾸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미국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전 참전이 도화선이 된 엄청난 시위가 대학가를 장악하며 ‘청년 문화’라는 말까지 생겨났던 것이다.
여기에는 자본주의 문명을 생산관계와 미디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으로(혁명적으로) 비판한 허버트 마르쿠제의 이론이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현장의 주변에 바로 헤르만 헤세가 있었다. 그는 왜 거기에 있는가. 스튜던트 파워의 본고장은 그 열기가 치솟는 뜨거운 용암 가운데서도 버클리가 가장 치열했다. 마르쿠제가 인근 캠퍼스 교수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버클리대학 남문부터 시작되는 텔레그래프 애비뉴, 그리고 동서를 잇는 뱅크로프트 웨이에 앉아있는 히피들이 어쩌면 진짜 주인공이었다. 머리와 수염을 있는 대로 늘어뜨리고 앉아있는, 그리고 갖가지 색깔로(주로 노란색) 물들인 맨발의 젊은이들 앞에는 기이한 그림이 들어있는 서적과 신문지, 혹은 얇은 소책자들이 놓여있기 일쑤였다.
그것들은 대체로 출처가 중동 지방인 것과 인도, 동남아시아 것들이 많았다. 요컨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것들이었는데, 내용과 관계없이 그것들의 존재만으로도 반체제적이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띠고 이상한 향내 비슷한 냄새를 가득 풍기고 있었다. 헤세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헤세는 히피들 사이에 그들이 늘어놓은 책자 가운데서 <유리알 유희> <황야의 이리> <수레바퀴 아래서> <데 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왜 이 작품들이 히피의 교본이 되고, 그들의 애독서가 되었을까. 헤세 문학의 본질은 그 속에 조용히 숨어있다. 반전과 반체제로 대변되는 히피들의 정신은 헤세의 소설 및 시와 연결된 바 비폭력의 유머가 그의 핵심이었던 헤세
문학의 정수에 그야말로 홀딱 매료되었던 것이다.
헤세의 시와 소설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는 태어난 지 한 세기 가까이 되어서야 본모습이 제대로 평가되었다. 실제로 독일 대학의 현대문학 강의에서 헤세는 동시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뒤늦게 커리큘럼에 올랐으며, 학생들로부터도 낯선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현상을 독일 문학계는 국내 작가의 ‘역수입’ 혹은 ‘역이민’이라는 말로 불렀다. 그런데 이는 국외에서 유명해진 작가를 나중에 국내에서 인정해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헤세’를 뜻한다. 말하자면 히피를 중심으로 한 청년 문화 덕분에 독일에서 중생重生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적인 치열함 대신 부드럽고 따뜻한 보편적 인류애를 그려온 그의 사랑 정신이 험한 시대를 지나며 울림으로 얼마나 큰지 사람들은 뒤늦게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린 시절을 그린 소설 <페터 카멘친트>의 한 토막이다.
오, 아름답고 끊임없이 떠도는 구름이여! 나는 철없는 아이 때부터 구름을 사랑하여 들여다보았다. 나 자신도 하나의 구름으로서 인생을 떠돌아다닐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방황하며 어디를 가든 이방인인 채 시간과 영원성 사이를 떠돌아다닐 것을. (…) 나는 그 당시 그들로부터 배웠던 것을 잊지 못한다. 그들의 형태, 색깔, 행동, 유희, 원무, 꿈, 그리고 휴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