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시인의 뜨락] 부활절에 다시 읽는 ‘데미안’ 작가 헤르만 헤세의 ‘기도’
[아시아엔=김창수 시인]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독일 태생의 소설가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을 주로 썼으며, 동양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우리는 헤르만 헤세를 소설가로만 생각하기 쉬우나 그는 시도 썼고 스위스 ‘테신’이라는 곳에서 2천여점의 그림을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헤세의 정신세계를 볼 때 그는 구도자였던 것 같다.
“새는 알에서 깨어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데미안>에서) 아마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중, 보통 교육을 받은 사람들치고 이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구절처럼 헤세의 인생 또한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신학교를 뛰쳐나오고, 자살을 시도하고, 일반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던 사람이다.
탄생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삶에서 죽음은 끊임없이 계속 이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들은 늘 새로운 삶으로 재탄생 되어야만 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진 것은 스스로 자기를 죽임으로써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죽음과 삶이 귀일(歸一)임을 제자들도 알아서 그렇게 살아 완성에 이르라는 것을 몸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영원에 이르려는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라고 말한 사도 바울처럼 절절한 자기 성찰과 현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넘어짐이 없이는 일어섬이 없다.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은 사람에게 희망은 없다.
아래 시 ‘기도’에서 시인은 절망을 수용하되 단 하나 신에게만큼은 절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신에게 이르는 데는 절망과 좌절과 비탄과 고뇌를 통과해야만 하기에 그러한 인간적인 넘어짐은 기꺼이 수용하되 신을 향한 지향만은 잃지 않아야 궁극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기꺼이 깨어지고 기꺼이 무너지고 기꺼이 죽겠사오나 오직 당신의 품에서만 죽을 수 있어야” 살 수 있다, 라는 것을 시인은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세계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기리는 기간이다. 이 즈음 교회는 예수의 고난이 갖는 의미를 오늘로 되살려 자기화 해야 예수의 참 뜻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기 도
하나님, 저로 하여금 제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당신께 대하여 만큼은 절망하지 않게 해 주소서
저로 하여금 나그네의 온갖 비탄을 맛보게 하시고
고뇌의 불꽃이 저를 휩싸게 하소서
저로 온갖 모욕을 겪게 하시고
제가 스스로 견디어 나가는 것을 도와주지 마소서
제가 발전하는 것도 거들어 주지 마소서
하지만 내 자아의 모든 것이 소멸했을 때면
그것을 행하신 분은 당신이라는 사실과
당신께서 불길과 고뇌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저는 기꺼이 깨어지고 기꺼이 무너지고 기꺼이 죽겠사오나
오직 당신의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