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시인의 뜨락] ‘풀잎’ 시인 휘트먼의 ‘한 마리 새앙 쥐의 기적’

미국의 시인, 수필가이자 기자였던 월트 휘트먼

[아시아엔=김창수 시인] 휘트먼(1819~1892)은 미국의 시인, 수필가이자 기자다. 초월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이행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자유시의 아버지’ 라는 호칭을 듣는다. 시집 <풀잎>(The Grass, 1855)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서양 근대문명의 가장 비극적 사실 중 하나는 인류가 우주 이야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는 동서양 모든 문화권에서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우주 이야기는 각 부족이나 민족 혹은 국가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각 족속들이 따라 살아야만 하는 도리나 지침 역할을 하였다.

우주 이야기는 신화의 형태 혹은 종교 형태로 혹은 이야기 형태로 짜여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안에 내면화하여 삶의 지표로 삼았다. 예컨대 동아시아에 속하는 한국, 중국, 일본은 천(天)을 상정하여 천명(天命)을 세계의 본성으로 상정하고 거기에 따라 사는 것을 도(道)라 하였고 그것을 체득하는 과정을 교육으로 보았다.(<중용>의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그러던 것이 수학적, 과학적 이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서양 근대에 이르러 하늘의 이야기, 우주 이야기는 과학적 인식론의 범주에 갇혀 질식사하고 말았다. 근대과학은 더 이상 하늘 그 어디에도 신이나 신비로움 혹은 어떤 계시를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는 사라져 버렸고 오직 과학만이 세계를 해석하는 틀이 되었다. 유물론 철학이 세계를 주로 지배하는 철학으로 귀결되었으며 그 결과 인류는 현실의 개인적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적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가지 큰 틀은 종교와 과학이다. 종교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 초이성의 영역을 인정하고 인간 실존의 한계를 극복하여 행복에 이르고자 한다. 반면 과학은 이성에 입각하여 세계의 사실적 진리를 추구하여 역사를 발전시키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흐름을 두고 ‘예수고난회’ 신부이며 고생물학자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종교와 과학은 궁극적으로 한 지점에서 만난다”고 했다. 두 흐름의 극한은 결국 합류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메가 포인트’이고 그 지점이 바로 ‘인류 구원의 완성 지점’이라고 한다.

휘트먼의 시집 <풀잎>

현대 세계는 샤르뎅으로부터 시작하여 과학의 틀을 넘어 다시 우주 이야기를 새로 쓰려고 하고 있다. 토마스 베리 신부의 <우주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류는 전통과 인간 내면의 발견으로부터 과학과 종교의 궁극 지점인 신비영역에서 다시 우주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만이 물신화된 현대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 존중, 생명 존중의 윤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심층생태주의자(deep echologist)들은 “만물은 각기 다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특히 “생명체는 본래적 가치 혹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타 존재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생명체는 물론이고 비생명체마저도 각 존재는 깜짝 놀라기에 충분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것의 최종판이 지구 자체를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 단독적 유기체로 보는 시각이 형성되었다.

아래 시 휘트먼의 ‘한 마리 새앙 쥐의 기적’은 우주의 신비, 그 중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말하고 있다. 풀잎 하나, 개미, 굴뚝새 알 하나의 완전함에 시인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청개구리는 최고의 걸작품이고 딸기 덩굴은 천국의 응접실을 장식하기에 모자람이 없으며 한 마리 새앙쥐는 기적이다.”

생명의 신비로움과 우주만물의 성스러움을 시인은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俗에서 聖을 보는 시인은 성에서 속도 볼 줄 아는 영성의 눈을 가졌으리라.

 

한 마리 새앙 쥐의 기적

풀잎 하나가 별들의 운행에 못지않다고 나는 믿는다.

개미 역시 똑같이 완전하고

모래알 하나, 굴뚝새의 알 하나도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청개구리는 최고의 걸작품이다.

땅에 뻗은 딸기 덩굴은 천국의 응접실을 장식할 만하다.

내 손의 가장 작은 관절이라도 그것을 능가할 만한 기계는 세상에 없다.

고개를 숙인 채 풀을 뜯는 소는 어떤 조각품보다도 훌륭하다.

그리고 한 마리 새앙쥐는

몇 억의 무신론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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