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거인 알리바바 마윈⑥] “인터넷에 이타주의가 있다”

SNS1[아시아엔=안동일 중국전문칼럼니스트] “20세기엔 IT 기술을 잘 활용하면 됐다. 금세기엔 데이터기술을 잘 활용해야 한다. 데이터 기술의 핵심은 인터넷이다. 정말 대단한 물건이다. 여기엔 이타주의가 있다. 상대가 나보다 더 능력있다고, 더 중요하다고, 더 총명하다고 믿어야 한다. 타인이 성공해야 비로소 내가 성공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데이터 기술시대에는 다른 사람이 강해질수록 당신도 비로소 강해진다.”

마윈이 지난 3월15일 하노버 세빗박람회 기조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인터넷에 이타주의가 있다”는 그의 철학이 비쳐진다.

마윈은 1998년 가을, 만리장성을 안내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사업구상을 야후의 창업자 제리양에게 설명했다. 마윈의 말에 흥미를 보인 제리 양은 자신이 적극 후원하겠다고 마윈을 격려한다. 실제 제리양은 마윈에게 손정의 회장을 소개했다. 마윈이 알리바바를 창립한 지 1년 후, 아주 어려울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알리바바에 큰 투자를 한다. 지금도 야후는 알리바바 지분 22.6%를 보유하고 있다.

그때 마윈은 드넓은 중국에 퍼져있는 중소·중견기업과 무수한 소상공인을 전 세계 기업·소비자와 연결하는 중국형 B2B 전자상거래 모델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이를 제리양에게 열정적으로 설명했고 제리양도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1999년, 마윈은 마침내 베이징을 떠나 항저우로 돌아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17명의 동료와 알리바바를 창업했다. 이른바 ‘18나한’ 이다. 세계를 겨냥했기에 세계인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을 골랐다. ‘아라비안 나이트’ 가운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의 알리바바다.

마윈을 영웅으로 만든 알리바바의 비즈니스 모델은 중국 중소기업 위주의 전자상거래다. 하지만 창업 당시 B2B 전자상거래를 기반으로 한 비지니스 모델을 회사 내부에서조차 반기지 않았다. 중국의 인터넷 보급률이 10%가 채 되지 않았을 당시 인터넷으로 거래를 한다는 것에 거부반응이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내부의 반대 목소리가 커져갈수록 마윈은 사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90%가 찬성하는 방안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것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다는 계획은 분명 많은 사람들이 시도할 것이고 그 기회는 우리가 갖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애플이 아이팟을 만든다고 했을 때 주변의 우려를 비웃듯 성공시킨 것처럼 마윈에게도 예상치 못한 길을 선택하는 기질이 다분했다.

초창기 알리바바는 인터넷에 생소한 중국시장에 맞추어 아주 간단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으로 시작했다. 기업들의 인터넷 거래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인터넷 플랫폼을 만들고 기업은 원가를 절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알리바바는 수수료를 받아가는 형태의 비지니스 모델이었다.

하지만 초창기 마윈은 중개 수수료를 받지 않는 등 중소기업에 특화된 전략을 펼쳤다. 중소기업이 전체 기업의 85% 이상 차지하는 중국의 특성을 고려한 과감한 투자이기도 했다.

무료를 주장하는 마 회장을 많은 동료와 전문가는 “미쳤다”고 손가락질 했다. 포브스는 2000년 그를 “나폴레옹처럼 작은 체구에 나폴레옹 같은 포부를 품은 사나이”라 묘사했다.

2002년 알리바바는 상징적인 성과인 1위엔의 순익을 낸다. 창업 후 3년 동안 투자만 계속했다는 얘기다. 마 회장이 순익이 없어도 견딜만한 투자를 끌어오고 내부를 단합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진정성 때문이다.

18나한이라 불리던 절친 동료는 창업 이후 지금까지 알리바바 곳곳의 고위 임원으로 곁을 지킨다. 예일대학을 나와 투자회사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던 차이충신을 비롯해 더 나은 직장과 조건을 포기하고 마 회장을 따른 많은 수재가 그가 보여준 진실한 믿음과 우정, 행복한 비전을 택했다.

큰 강점인 영어 실력도 빛을 발했다. 진심이 담긴 웅변은 어디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생전 처음 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6분 만에 사로잡은 프리젠테이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손 회장이 결정한 2000만 달러(약 213억원) 투자는 알리바바의 성장에 결정적인 날개를 달아줬다.

<사진=신화사>

2002년을 기점으로 알리바바는 가파른 성장세로 돌아선다. 수익과는 별개로 마윈은 또 다른 선택의 고민에 빠지게 된다. B2B시장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C2C시장으로의 진출을 생각하게 되는데 불도저같은 마윈도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베이(ebay)라는 거인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B2B시장이야 ‘정확한 시기에 정확한 행동’으로 성장했지만 중국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던 이베이와 경쟁을 한다는 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보다 더 큰 도전인 것을 마윈도 알고 있었다.

2002년 3월, 중국의 C2C시장의 선두주자 이취와 미국의 이베이가 전략적 협력 파트너십을 맺는다. 이베이가 33%의 이취 주식을 얻는 조건으로 3000만 달러를 투자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이베이의 CEO 휘트먼은 자신감에 가득 차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중국의 전자상거래 시장은 12배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며 16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는 이취와의 협력으로 중국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개척해 나아갈 것이다.”

지금도 마윈은 타오바오의 탄생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하곤 한다. 2003년 4월, 알리바바에서 인정받던 10명의 인재들이 소리 소문 없이 잠적해 버린다.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한달 전, 마윈은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강하고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기로 소문난 직원 10명을 자신의 개인 사무실로 비밀리에 부른다.

“회사에서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데 당신들이 맡아주길 바란다. 앞으로 얼마간 집에 자주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떻게 회사에서 보상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알리바바 판매 총책임자인 쑨퉁위를 프로젝트 책임자로 임명한다. “우리도 이베이를 뛰어 넘는 C2C를 한번 만들어 봅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더 조용히 더 멋지게!”

그렇게 마윈은 이베이 이취를 격파할 알리바바의 전사들을 노르망디에 상륙시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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