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거인 알리바바 마윈⑦] ‘타오바오’, 이베이를 쫓아내고 중국시장 석권하다
[아시아엔=안동일 동아시아 연구가] 마윈 회장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우리는 수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더 편하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터넷 기업이 아니라 서비스 기업이다.”
알리바바는 기존의 인터넷 기업과 사업 방식이 다르다. 회원의 어려움을 어떻게 하면 잘 해결해주고 그들이 편하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도와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돈 보다는 중소기업을 돕고자 하는 진정성이 우선인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의 중소기업, ‘중국’의 농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타오바오’(淘?)의 탄생
2003년 중국에서는 중급성호흡기증후군 바로 사스가 창궐했다. 타오바오 오픈의 총책임자 쑨퉁위는 당시를 돌이켜보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때는 차라리 사스에 걸렸으면 했다. 뒤로 물러설 곳도 없으니 이왕 죽을 바에 앞으로 걸어가면서 다같이 장렬히 전사하자는 마음을 팀원들과 나누게 되었고 그런 상황이 오히려 우리 팀의 단결과 대외홍보의 전화위복이 되었다.”
실제 사스는 ‘전자상거래’ 문화를 결정적으로 확산시킨 계기가 됐다. 사람들이 시장이나 대형마트 등에 나가서 장을 보는 것을 꺼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신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고 택배를 통해 받는 전자상거래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항저우시 시장(市長)도 사스 발생 기간 동안 알리바바를 방문해 “전자상거래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시장이 알리바바를 방문한 직후 직원 한 명이 사스에 걸리는 불상사가 터졌다. 때문에 알리바바를 방문했던 항저우 시장까지 특별 격리조치되는 초유의 불상사가 터졌다. 그 덕에 마윈과 알리바바는 연일 뉴스의 1면톱을 장식했다. 지금도 알리바바에서는 당시 사스 사건이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이렇듯 사스도 타오바오의 탄생을 막지 못하고 2003년 5월10일 www.taobao.com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2000년 마윈은 <포브스>의 표지모델로 채택이 되는데 다른 언론보다도 특히 포브스는 마윈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포브스조차 마윈의 타오바오가 C2C시장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타오바오가 탄생하고 한달 후 중국을 들썩이게 한 빅딜이 일어난다. 이베이가 이취의 잔량 주식 67%를 15억 달러에 매입하기로 한 것인데 이베이의 야심이 드러나면서 드디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마윈은 기죽지 않고 진솔한 광고로 이베이의 경쟁사는 타오바오라는 공식을 만들어 갔다. 하지만 이베이의 물량공세는 타오바오를 계속 궁지로 몰았다.
마윈의 알리바바가 타오바오를 위해 1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하면 다음날 이베이는 광고비로만 1억 달러를 투자해 회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게 하겠다고 발표하는 그런 식이었다.
마윈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대형 포털사이트를 포기하고 보털사이트, BBS, 개인 홈페이지를 집중 공략하기로 한다. 마오저뚱이 국민당의 탄압을 견디지 못해 농촌을 먼저 장악하고 도시로 진격했던 방법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마윈의 농촌 공략(중소 포털)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면서 타오바오를 일등 이취를 추격하는 ‘노력하는 2인자’라는 대중의 인식을 얻게 된다.
2인자가 취할 수 있는 마케팅 중 가장 솔직하게 대중하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2인자임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노력한다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마윈이 택했던 전략이다.
그러다 기회를 포착한 마윈은 1인자를 무너뜨릴 강력한 공세에 나선다. 전세가 뒤집힐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데 그게 바로 이베이이취의 9.17발표이다.
2004년 9월17일 발표된 이베이이취의 9.17전략은 바로 이베이이취의 중국 판매망을 세계와 통합한다는 전략으로 전 세계와 공동 플랫폼을 사용하게 하여 중국 고객들에게 더욱 많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나름 이베이의 야심찬 계획이 오히려 중국 고객들에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중국인들의 국수적 애국심을 간과했던 것이다.
이 시기 마윈은 일본의 손정의 회장을 다시 만나는데 이 만남에서 타오바오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절대 강자 이베이가 일본에서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야후 재팬과 맞붙어 70% 이상의 점유율을 내주게 되는데 이베이의 경영문화가 아시아와는 괴리감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마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오바오가 갖고 있던 모든 역량을 쏟아 이베이는 미국 자본가의 회사, 알리바바와 타오바오는 중국 농민들의 회사라는 이미지를 강력하게 어필해 이베이의 고객들을 자사로 흡수하는 쾌거를 올리게 된다.
마치 둑이 무너지자 물길이 노도처럼 밀려오듯 이베이 구좌가 순식간에 타오바오로 몰려 왔다. 특별한 프로모션 이벤트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해 12월25일 마윈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베이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이제 이베이에게 한달의 시간을 줄 것이다. 한달 뒤 우리는 더욱 더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을 것이다.”
그때는 춘절 선물이라 해서 여러 이벤트를 했고, 이 이벤트가 결정적으로 어필했다. 다시 한번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연상케 하는 마윈의 전술이 돋보인 성공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타오바오는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중국의 1등 전자상거래 사이트가 되었고 2007년 이베이는 두손을 번쩍 들고 중국 철수를 발표하게 된다.
알리바바와 타오바오, 그리고 얼마 후 오픈한 티몰은 그 넓은 중국땅 전자상거래의 80%를 점유하는 거대 오픈마켓이 되었다.
타오바오의 승리 이후 중국에서 가장 큰 유행어가 바로 ‘늑대의 본성’이다. 타오바오가 늑대처럼 호랑이를 유린하고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다 무리지어 한번에 이겼다고 해서 수억명의 타오바오 추종자들이 타오바오를 늑대에 비유하며 좋아했다.
중국의 전자상거래를 평정한 마윈은 월마트와 경쟁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그가 보여준 발상의 전환, 열정, 긍정의 힘은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게 해줬던 것이 사실이다. 적어도 중국인들에게는.
2007년, 알리바바는 홍콩증시에 상장하면서 세계시장에 데뷔했다. 하지만 홍콩 증시 데뷔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 외형상으로는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알리바바와 타오바오의 수익구조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