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거인 알리마바 마윈⑤] 100번 실패하면 101번 일어난다
[아시아엔=안동일 동아시아 연구가] 중국 최대의 검색 사이트 바이두가 핫토픽이라 하여 발표하는 검색어 순위에서 마윈은 2014년 9월 이래 늘 상위를 차지한다.
4월 첫 주에는 ‘마윈, 대학 학장 취임’이란 소식이 일주일 내내 핫 토픽에 올랐다. 마윈이 고향 항저우에 후판대학이라는 학교를 설립하고 학장에 취임했다는 소식이다. 아직 대학 규모며 당국의 정식 인가 여부 등 자세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관계자들과 학교 정문에 서 있는 모습이 바이두에 올랐다.
그가 ‘소호강호’를 좋아한다더니 대나무로 된 정문과 현판을 보니 무협지에 나오는 어느 문파의 정문 느낌이 난다. 발표된 내용을 보면 후판대학은 창업자를 양성하는 일종의 경영대학원이다. ‘제2, 제3의 마윈’을 만들겠다는 마윈의 의지가 담겨있다. 마윈과 함께 이 학교를 세운 공동 설립자 면면이 꽤 호화롭다. 완퉁(萬通)부동산, 푸싱(復星)그룹 등 중국 재벌급 회사의 회장과 칭화대와 베이징대 학장급 교수들이 이름을 올렸다.
가르치는 과목은 아주 특이하다. 다른 경영대학원(MBA)과 달리 “사업할 때 이런 짓하면 실패한다” “이건 기회니 꼭 잡아라” 그런 걸 가르친단다.
마윈은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나만큼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바로 그 ‘잘못’을 연구해 그걸 피해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 학교 입학조건은 창업 3년 이상, 직원 30명 이상의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인이고 수업은 2달에 한번 5일씩 몰아서 진행된다. 3년 과정으로 총 학비는 1인당 우리 돈 5000만원 정도. 중국의 현실에서는 꽤 센 편이다. 중국의 일반대학 등록금 평균은 아직 1년에 우리 돈 50만원 수준이다.
사실 마윈의 창업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지금 승승장구 하고 있는 알리바바도 2009년까지 이렇다 할 수익을 내지 못했다. 그만큼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이야기다. 번역사를 창업한 마윈은 친구와 동료들에게 힘을 보태주기를 요청했고, 마윈의 실력과 인성을 알았던 그들은 기꺼이 하이보 번역사에 들어왔다. 하지만 생각만큼 이윤이 발생하지 않자 마윈은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공예품부터 시작해서 작은 일용품까지 가져다가 항저우에 판매하면서 회사를 연명했고 나중에는 의료기기까지 파는 상황에 다다랐다.
당시 사람들은 마윈의 이런 모습을 두고 인생의 내리막에 섰다고 평했음직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기 위한 계곡 탐험의 시작이었다. “뚝심을 지키며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다”는 마윈의 스토리는 이 때부터 시작이다.
그럴수록 마윈은 좌절하지 않고 꿋꿋한 심성을 지키며 열심히 뛰었다. 그런 그가 인과응보격인 인연으로 1995년 초, 미국 땅을 처음 밟으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는 얘기는 지난번에 전한 바 있다. 바로 컴퓨터 인터넷과의 만남이다.
마윈은 미국에 가기전만 해도 컴퓨터 키보드를 한번도 만져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인터넷이 뭔지 조차 몰랐다. 미국(시애틀)에서 처음 컴퓨터를 앞에 두고 미국인 친구가 인터넷에서 뭐든지 검색해보라고 했을 때 처음엔 싫다고 거절했다. 당시 중국에서 컴퓨터는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었고, 혹시 타이핑 하다가 컴퓨터를 고장낼 까 두려웠기 떄문 이다.
키보드를 두드려도 폭발하지 않을 테니 아무것이나 쳐보라고 했을 때, ‘beer’(맥주)란 단어를 조심스럽게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했다. 유명한 얘기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세계 각국의 맥주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는데 중국의 맥주는 없었다. 다시 호기심에서 차이나(china)라고 타이핑했을 때 역시 아무 것도 검색되는 것이 없었다.
이런 문화충격을 안고 항조우에 돌아왔을 때 인터넷으로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인터넷에 본인의 회사(하이보 통역사)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3시간 만에 4건의 메일을 받았다. 모두 해외로부터였다. 본인과 세상을 바꿀 도구라는 걸 직감했다고 한다.
1996년 4월 친구 돈까지 포함해 2만 위안(약 329만원)으로 정보기술(IT)회사인 하이보(海博) 네트워크를 차렸다. 홈페이지를 제작해주는 업체였다. 하지만 회사의 실적은 형편 없었다. 당시 홈페이지, 인터넷에 관심을 쏟아 투자를 하려는 기업이나 개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윈은 좌절하지 않고 인터넷에 대한 관심을 끌어모아야 한다고 다시 회사를 창업한다. 그 회사가 ‘차이나 옐로우 페이지’(중궈황예)였다. 중국에 관한 특히 비지니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 회사였다.
마윈은 그 시절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일류적 생각과 삼류적 집행력, 삼류적 생각과 일류적 집행력 중 하나의 조합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후자를 택한다.” 좋은 전략과 관리 시스템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집행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황예’ 역시 실적은 형편 없었다. 중국 최초 인터넷기업으로 꼽히는 이 기업은 준비 부족과 중국 내 인터넷 인프라 부족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지난해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한 강연에서 그때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90년대 중반 중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하면서 매우 외로웠다. 누구도 날 믿지 않았고, 나도 내가 뭘 말하고 있는지 몰랐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인터넷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뿐이었다.”
마윈은 이런 사업이 정부당국의 관심과 협조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정부부처를 돌아다니며 설득을 시작했다. 처음엔 항저우에서 시작한 부처에 대한 설득이 얼마 후에는 베이징의 중앙정부쪽으로 확대됐다. 그때 정부 관계자들은 무언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하지는 않다는 그런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입장이었다.
그때 마윈은 정부 당국자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두고 보라. 앞으로는 인터넷 시대가 열린다. 특히 무역분야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또 인터넷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다. 인민들이 일자리가 없으면 중국정부가 곤경에 처한다. 내가 하는 일은 중국에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중국정부를 돕는 일이다.”
하루는 정부 당국자가 이런 제안을 해왔다. 베이징 중앙정부 대외무역부 고위 관계자였다. “당신 말이 정말이라면 그러지 말고 우리 부서에 들어와서 인터넷이 대외무역의 총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 어떻겠는가?”
마윈과 동료들은 고민 끝에 이를 수락하고 함께 베이징으로 올라가 대외무역부 계약직 공무원 생활을 한다. 이 시기 마윈과 친구들의 베이징 시절은 그들이 중국 전역에 고속 인터넷망이 깔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면서 정부 관리들과 일반인들에게 인터넷의 중요성을 실제로 알린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처음에 중국 관리들은 정보의 통제를 염두에 두고 고속 인터넷망보다는 관공서와 주요 기업체들만 접속이 가능한 내부 인트라넷을 구축하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외무역부 고위인사로부터 마윈은 아주 중요한 외국 인물이 베이징에 오는데 영어를 잘하는 당신이 그에게 만리장성 안내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야후의 창업자 제리 양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