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시인의 뜨락] 위안부 다룬 일본 시인 이토오 ‘조선의 오미나’
[아시아엔=김창수 시인] 이토오 게이이치(伊藤桂一1917-2001)는 일본의 서정시인으로 시 입문서 <서정시 입문>을 남겼다.
젊은 군인 이토오 게이이치는 중국 산서성에 주둔해 있을 무렵, 자신이 직접 목격한 위안부 이야기를 ‘조선의 오미나’라는 애틋한 서정시로 썼다.
전체주의란, 개인은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정부나 지도자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정치사상 및 정치 체제다(다음 포털에서 인용).
20세기 전체주의 국가 일본은 국가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희생할 것을 강제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일제는 의무에 있어서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인들을 일본의 국가 이익에 부합한 행위를 하도록 조직적으로 강제 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젊은이들을 징용, 학도병, 정신대, 위안부 등의 명분으로 끌어갔다.
필자가 위안부 문제를 국내에서 최초로 고발한 김학순 할머니를 처음 만나 것은 1994년 가을이었다. 당시 필자는 장충동에 소재한 ‘여성교회’(교회명칭)에 아내와 함께 출석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증언은 역사책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할머니의 증언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본인이 직접 체험한 당신 삶의 처절하고 생생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김학순 할머니는 정신대 문제 항의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
아래의 시 ‘조선의 오미나’에서 일본인 지식인 병사는 조선의 위안부를 안쓰럽게 바라본다. 조선의 가락과 함께 눈물 흘린 시인의 인간애는 윤리도 도덕도 존재할 수 없는 참혹한 전쟁 앞에서 무력하기만 하다. 그래도 시적 재능이 풍부한,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시인의 눈에는 조선인 오미나는 크나큰 폭력 앞에서 부르르 떨고 있는 가련한 한 인간으로 보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청춘을 짓밟힌 조선인 위안부들은 8.15 해방 이후에도 자기 나라인 이 나라와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하고서는, 국가와 사회는 그녀들에게 ‘더러운 년들’이라는 낙인을 찍고서 손가락질 하며 능멸하고 핍박하였기 때문이었다. 누구 하나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치욕스러웠느냐”며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사람 없는 상태에서 그녀들은 두더지처럼 숨어 지하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사실상 국가라는 것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필요악의 성격을 지닌 폭력 기구다. 인간의 의식이 진화하면 없어져야만 하는 제도다. 나를 확대하면 이웃이 되고 이웃을 확대 하면 국가가 되고 국가를 확장하면 세계 인류가 된다. 그리고 인류를 확장하면 생명의 세계가 되고 생명 세계를 확장하면 비생명체까지를 아우르는 우주가 된다. 그 우주 의식이 국가를 없앨 수 있게 한다. 그리되면 우리에게 내면화 되어 있는 일제 강점의 상처도 훌쩍 넘어서서 인류 평화의 길에 나설 수 있다.
먼저 가신 위안부 할머니들과 아직 생존해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께 마음을 담아 위로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조선의 오미나(おみな, 여인)
조선의 오미나들은 예쁘지는 않아도
이곳 북쪽 중국 추운 산서성까지 끌려왔구나
군인들과 함께 여기 저기 주둔지를 따라다니며
어쩌다 한 번씩 내뱉는 조선말
우리들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오미나들의 한숨인 것을
군인들이 토벌 나간 텅 빈 막사
죽은 듯이 적막 한 청루(靑樓 위안부숙사) 난간에 기대
부르던 조선의 민요
그 슬픈 가락은 눈물에 젖어
조선의 오미나들은 예쁘지는 않아도
그 소리 듣고 있노라면 나마저 가슴 아파
오늘 이 황량한 마을에 전우는 다 죽고
살아남은 자 몇이서 떠나려 하니
마을 사람들 일장기 들고 나와 전송하고
가엾은 조선의 오미나들은 저 구석에서
잘가라 야윈 손만 흔드네
아스 라히 멀어져가는 우리가 부러운 듯
야윈 손만 가물거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