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시인의 뜨락] ‘내가 아는 사람은’과 함석헌 선생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아시아엔=김창수 시인]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니코마쿠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이성(지식)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 소피아(sophia, 지혜-초이성의 영역을 알고자 하는 이성), 프로네시스(pronesis, 윤리, 도덕적 이성), 에피스테메(episteme, 인식-수학, 과학 논리적 이성), 테크네(techne, 기술, 도구적 이성)가 그것이다.
서양의 근대는 그 중에서 수학적, 과학적, 논리적 이성인 인식론 철학(에피스테몰로지)과 기술과 도구적 이성(테크네)이 주로 발달하였는데, 거기에는 지혜나 윤리도덕이 자리할 공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서양의 근대와 서양의 근대에 영향을 받은 세계는 인간적인 품위와 정서는 배제된 문화가 널리 퍼진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근대 이후의 교육은 수학과 과학을 잘 하는 사람이 높게 평가될 수 있는 평가 체계를 만들어 그것으로 사회적 가치를 차등 분배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말이 안 되는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 즉 사회적으로는 명망이 높은데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는 형편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우리나라의 경우, 서울대 법대·의대에는 수학과 과학적 이성이 발달한 사람들이 주로 가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차원 높은 도덕과 윤리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윤리 밖에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볼 때 인간성에 대해 절망을 하다가도 시선을 옆으로 조금만 돌리면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사람들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아래의 필자의 시 ‘내가 아는 사람은’은 지금 내 곁에서 서로를 위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서사다. 제자 ‘서연’이는 자신도 고달픈 노동으로 손이 부었지만 자신보다 더 아픈 엄마 다리를 주물러 준다. 스물 셋부터 환갑이 될 때까지 전신 관절염으로 휠체어에 앉아 생활을 하는 친구 ‘재생’이는 가끔씩 자신이 지은 농산물을 부쳐온다. 호주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던 ‘영숙’이는 집을 판 돈으로 내 병원비를 보탰고 친구 ‘수정’이는 애 둘이 딸린 홀아비의 애절한 눈빛에 시집을 가주어서 두 아이를 잘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다. 수학과 과학과 논리가 아니라 나눔과 배려와 경청이다. 내 옆에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어디 내 곁만 그러랴! 언론이 자극적인 것들을 팔아 생존하기 때문에 세상이 온통 절망과 비정함으로 채워진 것처럼 보도해서 그렇지,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
내가 아는 사람은
부은 손으로 부은 다리 주물러 주기
내가 아는 사람은 이러고 산다
전신관절 휠체어 몸으로 직접 지은 농산물 나누기
내가 아는 사람은 이러고 산다
이국 땅 호주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친구 수술비로 집 팔아서 보태기
내가 아는 사람은 이러고 산다
동네 노총각 애절한 시선에 시집 가주기
내가 아는 사람은 이러고 산다
이통치통(以痛治痛) 함시로 이러고 산다
내가 아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