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시인의 뜨락] 박기동의 ‘부용산’, 월북 작곡가 안성현 만나 ‘민중가요’ 되다
[아시아엔=김창수 시인] 박기동은 1917년 여수의 섬 돌산 출신이다. 12살 때 가족을 따라 벌교로 이주하였다. 일제의 강압 통치 하에서 방황하다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우리나라 말과 글을 갈고 닦는 시인의 꿈을 꾸게 되었다.
해방 이후 몇몇 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좌파 계열의 남조선교육자협회에 가입해 교사직이 정직되기도 하였고, 그 후 정부의 탄압 속에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아래의 시 ‘부용산’은 평생 동안 박동기 선생의 인생에 족쇄로 작용하였다.
‘부용산’은 시집간 박기동의 여동생이 1947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여동생을 벌교 뒷산 부용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지은 시다. 그리고 박기동이 목포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에서 근무하던 중 제자 김정희 학생이 요절하자, 같은 학교 음악교사인 안성현이 제자의 죽음을 애도하여 ‘부용산’에 곡을 붙여서 노래로 탄생하게 되었다.
제자 김정희의 죽음은, 시인에게는 여동생의 죽음과 분리 되지 않은 사건의 연장이었다. 안성현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라는 동요 작곡가로 6·25 전에 월북했다.
노래가 된 ‘부용산’은 오늘날의 ‘아침이슬’이나 ‘임을 위한 행진곡’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당시에는 빨치산들이 불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박기동은 수시로 기관에 끌려가서 고문과 탄압을 받았다.
원래 박기동은 시 ‘부용산’을 노랫말로 치면 1절에 해당하는 것만을 썼다. 그 후 박기동이 호주로 이민 가서 살던 중, 1998년 부용산 독창회를 목포에서 여는데 시가 너무 짧아 단조로우니 2절을 지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51년만에 2절을 쓰게 되었다. 이것이 ‘부용산’이라는 시 한 편이 50년이 넘게 걸려 쓰이게 된 기가 막힌 사연이다.
사실 ‘부용산’은 사랑하는 누이를 부용산 자락에 묻고 내려오며 사무치는 슬픔과 그리움, 허망함을 못 이겨 쓴 한 편의 시다. 통일신라 월명사의 ‘제망매가’와 같은 맥락의 시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박기동의 삶의 이력으로 인해, 그리고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시인은 탄압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고 노래와 시는 금지곡이 되어 남도지방에서 음성적으로 불리다 되살아난 곡이다.
성서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으라”는 말이 있다. 슬플 때 슬픔을 표현할 수 있고 기쁠 때 기쁨을 마음껏 나타낼 수 있으며 그런 상황에 처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이 땅의 이데올로기는 남북분단도 모자라 부모형제들을 갈갈이 찢어 놓고서 상호적대와 반목을 강요하였다. 대동강 얼어붙은 물은 해마다 봄마다 풀리는데 이 땅의 비극적 상황은 언제나 풀릴지 가슴이 메어진다.
부 용 산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을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 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1947년)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19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