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첫 발간 100주년②] “알은 하나의 세계, 새끼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

PC 작업 중에 두번이나 바아러스로 애를 먹었는데 현재도 불안하여 좀 미완의 원고를 보내니 양해하고 정독하여 교정바랍니다. 이런 사정으로 큰 제목이나 중간 제목을 기사화할 수 있게 못 적었습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책이지만 워낙 제가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는 열성 팬이라 힘드는 가운데 신명나게 정리해 봤습니다. 내용이 시사할 점은 많지만 워낙 방대한 헤세의 글이라 미진한 점 양해하여 바쁘더라도 세밀히 교정바랍니다. 특히 독자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자극적인 중간 중간 제목을 넣어 독자들에게 구미가 당기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사진은 PC 문제로 카카오로 보내겠습니다. 거듭 미안합니다. 박상설 드림.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힌 외국 소설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데미안>이 가장 앞쪽에 놓일 것이다. 중장년층에서는 특히 압도적으로 이 책이 꼽힌다.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데미안>이 올해 출간 100년을 맞는다. <아시아엔>은 이에 맞춰 박상설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께 데미안 독후감을 부탁했다. 올해 91세인 박 전문기자는 한쪽 시력을 어려서 잃은데 이어 3~4년전부터 나머지 한쪽 눈도 거의 실명단계에 놓여 어렵사리 이틀에 걸쳐 독후감을 완성해 보내왔다. 박 전문기자의 독후감을 세차례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저자, 캠프나비 대표] 무명시인이던 헤세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작품 속에서는 용감하고 조금은 감성에 젖은 혁명을 시도하면서 세계와 사회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통해 시인이 되어가는 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데미안’ 첫 발간 100주년 맞아 책 속의 데미안을 찾다

현실과 대결하는 영혼의 발견을 담은 헤르만 헤세의 걸작 <데미안>을 이제 본격적으로 산책해보자. 데미안은 독일 문학의 거장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발표됐다. 열 살 소년에서 스무 살 청년이 되기까지 힘들고 고독한 성장과정을 그렸다. 인생의 방황을 경험하며 인간의 불안과 좌절에 사로잡힌 젊은이의 내면을 다룬 이 작품은 지금까지 한 세기를 지나면서 우리들에게 마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목사인 부친과 선교사의 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헤르만 헤세는 감성적이며 서정성이 강한 신낭만주의적 작가로 출발했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내적인 사고를 갖게 돼, 시기와 증오보다 사랑을, 전쟁보다 평화를 강조했다. 데미안 작품에는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해온 궁극적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의식과 무의식, 낮과 밤, 관능과 지성, 자성과 도취 등 서로 대립적인 세계 속에서 방황하는 두 세계 중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다만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는 데미안의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일생이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그 길을 찾아내려는 험난하고 힘든 실험의 과정이다.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그 누구도 확실한 대답은 못한다. 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길이다.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나’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양상의 세계 속에서 제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새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새끼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라압락사스이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세계를 깨뜨리고 ‘나’에게로 날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만의 삶을 누릴 수 있다.

필자 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삶에서 심연에 던져진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 인간은 서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자가 지닌 고유의 뜻을 아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고유의 뜻은 알지 못 한다. 내가 어떠한 말로, 표정으로, 행동으로 표현을 해보아도 그 누구도 알지 못 한다.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의 것이기에 ‘나’ 자신의 마음으로만 들여다볼 수 있으며 ‘나’ 자신의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의 ‘잠언적 어록’

내 가슴에서 솟아나오는 것 그것을 나는 살아야 한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인간이란 본래 자신의 고유한 모습, 내면 속에서 솟아나는 바로 그것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자유이고 그 자유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는 우리의 자유를 억압받고 진정 ‘나’로서 살아가기 어렵다. 언제부터인가 정해져버린 틀 속에 우리의 몸을 끼워 맞추고 그것만이 ‘행복한 삶’이라고 거짓 포장을 하고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것에 속지 말고 진실된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진정한 자신만의 삶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된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보다 나에게만 존재하는 위대한 힘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나’와 친해져야 한다. ‘나’와 손을 잡고 ‘나’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 그 위대한 힘은 몸 밖으로 발휘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인간을 증오할 때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들 내부에 들어 있는 선입관으로 증오하는 것이다. 우리들 내부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좋아하는 것은 결국 나의 내부 속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와 연결되어 그것이 자극되고 흥분되어 분출되는 감정인 것이다. 한 인간을 둘러싼 세계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결국 그 인간의 내부와 연결되어 그 내부에 따라 보 여지고 느껴지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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