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싯다르타③] 당신이 진정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

싯다르타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철학과 심리학 서적에서 어휘 하나하나에 짜릿함을 느꼈다면 소설 <싯다르타>에서는 어떤 큰 울림이 가슴을 치는 느낌이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일상의 삶 자체를 통해 몸소 마음과 몸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고행이 아닌가 싶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고 그 고통의 잔상 속에서 순간을 극복하는 자연스런 삶이 안식을 불러오는 길일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해진 구도의 길을 마다하고 세속으로 돌아가 삶을 통해 자신을 깨우치는 싯다르타에게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는다. 내면에서 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의 정서도 느껴봐야 했고 세상의 번뇌도 모두 끌어안고 겪어봐야 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필요 없다고 여기는 명예나 재물같은 것은 없어서는 안 되지만 지나치면 재앙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생각이 또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이 끝없이 이어지니 인간의 삶은 번민의 굴레인 것 같다. 완벽한 존재인 부처와 다르게 수행을 포기하고 인간의 삶으로 돌아가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들을 느끼며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 또한 완전한 깨달음인 듯했지만 완전하지 않았음에 다시 또 번민에 차고, 다시 또 깨닫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부처의 길을 가는 것 같다.

우리가 바라는 삶이 줄 수 없는 것

헤르만 헤세의 대부분 작품은 한 개인의 영적인 성장 과정을 묘사하는 전통적인 인문소설로 특유의 가치를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다른 인문교양 소설인 경우 주인공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 유용한 인물로 성장하여 그 사회의 일원이 되는 반면 헤세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가 아닌 먼 미래의 이상향이나 문명 이전의 원시적 본향을 향하여 자신을 성장시켜 나간다. 스스로를 시인이며 탐색자이며 고백자라고 불렀던 작가 헤세의 작품들은 무엇보다도 한 인간의 자기실현 과정을 그린 영혼의 전기다.

헤세는 산과 초원, 호수, 특히 강을 사랑하며 별과 구름에 몰두하며 자신이 자연과 하나라고 느낀다. 그는 인간의 소리보다 신의 언어인 자연의 현상과 훨씬 더 친근하게 지낸다. 절대자의 총체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안식을 얻는데 몰입한다. 이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목표는 주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안식이라는 서구적인 사유와 일치한다.

싯다르타 소설에서 형상화된 싯다르타의 모습이 예수와 부처의 통섭이라든가 이 소설이 동양의 신비적 구원의 도(道)에 기독교적 색채가 담겨져 있다든가 하는 지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며 인도와 중국 철학 및 정신세계에 평생을 몰두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선교사이자 저명한 인도학자였으며 기독교뿐 아니라 인도 종교와 정신세계를 배웠다. 그리고 공자와 노자 등 중국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영향으로 헤세가 싯다르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은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독자적인 인문적 신앙이다.

싯다르타는 사랑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이 세상과 자기 자신과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신적인 총체성을 완성하는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싯다르타가 지니는 고유하고도 본질적인 표상이다. 세계 단일성을 통한 참다운 인류 발전이라는 테마는 싯다르타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문학적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파란 눈의 세계적인 명상스승 아잔 브라하마의 잠언

삶을 깊이 관조하다 보면 삶이 자신의 통제권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은 당신이 관여할 일이 전혀 아니다.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체험하든 이렇게 말하라. “내 일이 아니야”라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염려하는 것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요. 그들의 업이요. 당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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