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싯다르타’②] 부처님, 부귀와 쾌락 버리고 순진한 아이로 다시 태어나

덜 된 부처. 그러나 그의 참모습 아닐까? <홍사성 시인 촬영> 

헤르만 헤세가 인도에서 발견한 부처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싯다르타(Siddhārtha, Gotama)는 불교를 창시한 인도의 성자. 그의 성은 고타마(Gautama 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 悉達多)이다. 부처님, 부처, 석가모니, 석가, 세존, 능인적묵, 여래, 불타, 붓다, 불(佛)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이런 이름들은 허구적이라는 뜻이며, 그럼으로써 인간들의 자아는 본래의 자기가 아니라 무아라는 의미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도단의 말이어서 흥미를 끈다.

헤르만 헤세는 인도의 동방순례를 통하여 동양을 모든 존재의 태초로 싯다르타를 서술했다. 이 책을 통하여 동양을 향한 헤세의 정신세계와 생애를 엿볼 수 있다. 필자는 불교세계관이 늘 궁금했지만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엄숙하며 <불전>(佛典)이 난해하여 억지로 긍정은 하면서도 불교를 통해 나를 바로 보는 기회를 뒷전으로 미루어왔다. 때로는 죄책감으로 불경을 펼쳐 봐도 어려워서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데미안> 발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글을 쓴 다음에 헤세의 <싯다르타>를 오랜만에 펼쳤을 때 헤세다운 문장이 어디로 이어지든 나는 그 길로 따라갔다. 그리고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간단명료한 구절이 눈에 번쩍 들어왔다. 사람은 종교적 요식행위나 제도권의 교육만으로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오직 몸과 마음으로 온갖 고행을 견뎌내며 초월적 삶을 극복하는 체험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그의 종교이야기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서사시적인 이 소설에 나는 빠져들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이고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것이다. 이런 대목에 매료되어 싯다르타를 재조명한다. 내가 선호하는 글귀가 보이면 언제나 즐겁다. 헤세다운 문장을 따라 동행해보자.

인도에는 출가하여 수행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이 출가수행을 사문(沙門)이라고 하며, 몸과 마음을 함께 출가해 고통의 수행 길에 든다. 부모와 가족을 떠나 안락함을 버리고 철저하게 홀로 정진·수행하며 모든 욕망을 초월하여 자신마저 극복한다.

출가수행의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오직 신을 통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고, 신의 은총을 구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야 하며, 이에 대한 일체의 논쟁도 있을 수 없다는 관념을 가진 ‘브라만(Brahman)의 길’이다. 이는 인도의 네가지 카스트 신분제도 중에서 가장 높은 승려계급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의 길은 본 적이 없는 신에 의지할 수는 없는 것이며 다만 스스로 노력하는 자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관점을 가진 ‘사문의  길’로 나뉘게 된다. 즉 자기 스스로가 고타마 붓다이며 남이 아닌 자신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매우 좁은 문이다. 이 경지에 오른 사람을 아라한(阿羅漢, an arhat)이라 하며 소승불교에서 불제자 중에 번뇌를 끊어 더 닦을 것이 없어 마땅히 공양을 받을만한 덕을 갖춘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불교 수행은 안락함을 버리고 철저하게 홀로 정진하여 마음을 정복해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을 이루기 위해 한 단계씩 오르는 체험의 길이다. 

성자의 단계

1.아라한(阿羅漢): 가장 높은 경지로 더 이상 배우고 닦을 것이 없는 최고 수행의 경지

2.아나함(阿那含): 다시는 업보로 인해 인간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경지. 육체에 대한 미세한 집착이 남아 있다고 한다

3.사다함(斯多含): 큰 욕망은 제거되었으나 집착은 남아 있어, 다시 한번 태어났다 천상에 이를 수 있다는 일래과(一來果)

4.수다원(須陀洹): 7번 죽고 7번은 태어난다고 하나 흐름에 들었다고 하는 참회와 입류망소(入流忘所). 진리의 여행길, 흐름에 들었다는 단계.

흐름에 든다는 것은 열반을 향한 여행길에 든다는 것이다. 여정은 험할지라도 머잖아 여행은 끝이 있을 것이다. 나무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꽃을 피운다고 했다. 자기 내면의 깨달음은 성장을 거듭하면서 꽃이라는 존재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내면의 노력을 이끌어 내는 동력이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이다.  

이야기 속으로

소설 <싯다르타>에는 주인공 고다마 싯다르타가 두 인물로 둔갑하여 나온다. 헤세가 본인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이 써오는 스타일로 자신의 자아를 찾아 수련하는 싯다르타와 초월세계의 신적 존재인 고다마 두 인물로 분리되어 펼쳐진다.

주인공인 싯타르다는 인도의 최상위 브라만 계급 출신이다. 싯타르타는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아버지 반대를 뿌리치고 친구 고빈다와 같이 수도의 길에 나선다. 여러 고뇌를 견디며 고행과 금욕의 생활을 이어가던 싯다르타는 단식과 명상에서 오는 고통은 자기라는 존재에서 오는 고통을 피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성자를 따르며 배우는 진리는 결국에는 자기 자신 내면에 있는 앎을 배우지 못하고 미지의 세계에 있는 참된 나를 구하다가 종국에는 열반에 이르지 못할 것 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고빈다는 세존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으려고 제자를 자청한다. 싯다르타는 제도적 종교행사만으로는 자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면세계의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세속의 길을 떠나게 된다. 속세로 돌아간 싯다르타는 기생인 카밀라에게 반한다.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카마스바미라는 거상에게 상술을 배워서 많은 재산을 모은다. 세속적인 삶에 빠져 싯타르타는 수도승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나’라는 자신마저도 모르게 된다. 쾌락과 번뇌에 물든 사람들과 어울려 빠져들다가 이것이 고통의 윤회 즉 반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랫동안 카밀라와 사랑을 나누고 쾌락에 빠졌던 싯다르타는 계속되는 고통을 못 이겨 떠난다. 카밀라와 마지막 사랑을 나누고 우연히 어느 강가로 떠나게 되는데 강변에서 단잠에 빠진다. 잠자는 중에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게 되며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던 앎을 깨닫는다.

부귀와 쾌락을 버리고 순진한 아이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싯다르타는 완전한 소리 ‘옴’(om, Aum이란 불교에서 眞言mantra에 비유하는 비밀스런 말)으로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는 세상 만물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강을 거울로 삼아 자연에 귀의할 것을 깨닫는다.

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평생을 강의 가르침으로 살아온 사공 바수데바의 조수를 겸한 친구로 같이 살아간다. 바수데바와 싯다르타는 강의 완벽한 소리 ‘옴’에 귀를 기울이며 깨달음을 점점 더 얻어간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들과 함께 붓다의 열반을 지켜보기 위한 순례에 나선 길에서 과거의 연인 카밀라와 재회한다. 하지만 그녀는 독사에 물려 죽는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번뇌를 아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한다. 바수데바는 지금 아들이 원하는 것은 세속적인 삶이며 아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둘 것을 조언한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이 바수데바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아들은 어느 날 싯다르타에게서 도망치고 싯다르타는 아들을 잡으려 따라가 보지만 찾지 못하고 실망한다. 절망한 싯다르타는 강물의 소리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이게 되고 흘러가는 강물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재만 있을 뿐, 선과 악, 삶과 죽음 그리고 만물이 그 강에 담겨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도망쳤던 일들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 그리고 카밀라의 지난 모습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 범죄자의 모습, 돌덩어리를 위시해 모든 만물 그리고 인간사의 고통, 행복, 즐거움 등도 모두 강물과 같은 자연섭리에 담겨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우친다.

그렇게 다시 한 번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순례 길에서 고빈다를 만난다. 구도에 도움 되는 말을 해달라는 고빈다에게 무언가를 구할 때 구하는 것만 희구하면 절대로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넓고 유연하고 자유롭게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지식은 알려줄 수 있지만 지혜는 전해줄 수 없고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시공에서 시간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완전하다든가 속되지도 않은 존재이며 모든 번민과 행복과 선과 악 등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빈다는 내면의 마음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의 감정과 존중의 감정을 싯다르타에게 느끼며 이야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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