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종교개혁 500년] 바르트 교수가 묻고 법현스님 답하다
독일의 루터교 원로신학자 한스 마틴 바르트 교수가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대학교?신학대학원생들에게 특강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열린선원 법현 스님이 그와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같음과 다름 등을 나눴다. <편집자>
바르트 교수는?
한스 마르틴 바르트 교수는 1939년 파울 바르트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에어랑겐, 하이델베르크,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65년 ‘루터신학에서 마귀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목사안수를 받고 1년간 미국 하버드대에서 수학했으며, 에어랑겐으로 돌아와 1970년 교수자격 논문 ‘무신론과 정통주의: 17세기 기독교 변증의 분석과 모델’을 집필했다. 그는 1976년 에어랑겐대 교수, 1978년 기센대를 거쳐 1981년 마르부르크대(조직신학과 종교철학 교수)로 옮겨 최근까지 교수직을 수행했다. 그는 1982년 에큐메니컬신학연구소를 설립했으며 개신교연합회회장(1997-2009)으로 활동하다가 2005년 은퇴했다. 2008년부터 한국루터학회(KLSS) 해외고문을 맡고 있다. 그는 창의적 글쓰기에 진력해 왔으며, △신학적 인간론 △루터신학 △에큐메니컬 신학 △로마 가톨릭과 정통주의 신학 △종교간 대화 등을 주로 연구했다.
법현 스님은?
무상법현은 열린선원 원장, 성공회대학교 채플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초빙연구원을 맡고 있으며 태고종 총무원 부원장, kcrp종교대화위원장을 지냈다. 중앙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동국대대학원에서 불교학 석사를 받고 박사과정(응용불교)을 밟았다. ‘틀림에서 맞음으로 회통하는 불교생태사상’ 등 다수 논문과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저서가 있다.
[아시아엔=법현 열린선원 스님, 성공회대 채플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초빙연구원, 전 kcrp종교대화위원장] 바르트 교수와의 만남은 이말테(본명 Malte Rhinow, 이말테는 한국이름) 박사의 역할이 있어 가능했다. 바르트 교수의 숙소가 루터대학교라 해서 강의를 마치는 시간에 나는 용인 루터대로 그를 찾아갔다.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고 다음엔 그가 내가 봉직하는 불광동 열린선원을 찾아왔다.
먼저 용인에서의 짧은 대화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날 오후 3시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바르트 교수는 자신은 독일의 마부르크에 살고 있다며 “티베트계 사찰에서 승려와 이야기도 나누고, 일본 교토, 미국 하버드대 등에서 종교간 대화와 불교와의 대화를 나누었지만 정통불교와 참선과 신비주의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는 독일어와 영어에 능통하고 나는 겨우 더듬거리는 영어를 할 뿐이어서 이말테 교수 부부 도움으로 대화를 나눴다. 어쩌면 언어가 매끄럽게 통하지 않아서 더욱 간절한 소통이 됐을지도 모른다.
바르트 부부는 일요일인 10월30일 오전 11시 용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 은평구 불광동 열린선원에 도착해 기독교와 불교간 대화를 나눴다. 용인 루터대에서의 만남 이후 두 번째 대화였다. 토탈 4시간 남짓 대화를 나눈 셈이다. 나는 한국불교 소개 영문책자와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보다 앞선 금속활자본인 백운경한(白雲景閑) 스님의 <직지심체요절> 영역본과 108염주, 천일홍 꽃차 및 비트차를 선물했다.
바르트 교수는 108염주를 목에 걸고 나와 대화를 이어갔다. 주로 바르트 교수가 묻고 내가 답하는 형식이었다.
바르트 교수: 윤회와 열반은 모순이 아닌가?
법현 스님: 윤회는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써 존재하고픈 욕망이 작용해서 자기도 모르게 다시 태어나 괴롭게 살아가기를 반복한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대개들 그것이 불교의 이론이라고 해서 따라야 할 진리인 것으로 오해한다. 교수님도 그럴 거다. 열반(nibbana, nirvana)은 윤회의 고리를 끊어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실제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모순이 아니냐고 묻는 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윤회는 불교에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윤회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열반은 윤회를 끊었다는 뜻이다. 티베트의 환생설은 인도불교의 윤회설과 그 의미가 다르다.
열반은 “윤회를 끊었다”는 뜻···티베트의 환생설은 윤회설과 달라
바르트: 열반을 얻기 위해서 어떤 수행을 하는가?
법현: 초기불교(테라와다불교)에서는 명상의 주제를 우선 몸과 몸으로 느끼는 느낌을 대상으로 해서 몰입하게 되면 삼마디(삼매)를 체험한다. 그 상태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인지하는 현상이나 법칙을 살피면 그 속에 흐르는 법칙, 진실을 알게 된다. 즉 아는 지혜를 계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넷을 “네 가지 살필 것”이라는 뜻에서 4념처(四念處)라고 부른다. 경전에 의하면 4념처를 수행하면 반드시 열반에 이른다고 한다. 다른 곳으로 빠지거나 물러서지 않고 오로지 열반이라는 과녁, 목표지점에 반드시 이르게 한다는 뜻에서 일승도(一乘道, ekayanamagga)라고 부른다. 이것을 비구보디라는 스리랑카 출신 학자승려가 유일한 길(only way)라고 번역하여 대부분 따르고 있으나 제대로 살폈으면 한다.
유식(唯識)불교에서는 마음의 작용 즉 의식의 흐름을 살펴서 때를 없애면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정토불교에서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이 지닌 덕성을 닮아 실천해서 부처님과 보살님과 같은 덕성체가 되려는 노력을 정근(精勤)이라고 하는데 주로 그 이름을 열심히 부른다. 여기에 참선의 의식을 결합시켜서 염불하는 이가 누군가를 마음에 새기며 염불하면 참선하는 효과와 같다고 하여 염불선(念佛禪)이라고도 한다.
간화선(看話禪)에서는 염불선을 정통이 아니거나 수준이 낮다고 하는 경향이 짙지만 염불선 계통에서는 정통선이라고 주장한다. 근거는 초기경전에서 붓다의 덕성을 그대로 따라서 붓다와 하나가 되는 것을 불수념(佛隨念, Buddhaanussati)이라고 하는데 염불이 바로 그와 같으므로 정통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 밀교 또는 금강승이라고 하는 현재 티베트, 몽골,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일부 하고 있는 진언(眞言, mantra, 呪文)수행이다.
중국불교에서는 인도의 사마타, 삼마디 위빳사나를 수나라 시기 천태지의 스님이 지(止)와 관(觀)이라는 이름으로 중국화한 참선이론이 있다. 조동종(曺洞宗)의 묵묵히 살피는 묵조선(?照禪)과 말씀을 주제로 명상하는 간화선(看話禪) 또는 화두참선(話頭參禪)이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를 거쳐서 원명청(元明淸) 시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가장 왕성한 수행법으로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기층 불자들과 승려들은 많이 어려워하고 있으며 요즘 시기에 테라와다의 수행법이 더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초기단계다. 나는 대승의 간화선으로 출발했지만 교학불교와 테라와다의 수행법 그리고 염불선도 익혀서 나의 수행에 배합하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지도하고 있다.
모세의 기적에 대한 두가지 해석
바르트: 붓다의 가르침은 욕망을 버리라고 한다는데 열반을 얻으려는 목표도 일종의 욕망이라고 생각되는데 서로 부딪치는 것은 아닌가?
법현: 어쩌면 당연한 물음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살아있으면,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것이 괴로움인데 그것을 근원적으로 없애버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깨끗하다면 얼마나 좋은 것인가? 비유하자면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이 진짜로 있다면 천국에 태어나려는 희망을 욕망이라고 표현해서야 되겠는가? 또 하나님의 존재를 향한 커다란 자비심을 욕망이라고 해도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더구나 본인이 그런 경지에 이르면 다른 이들에게도 그 방법을 일러줘서 같은 경지에 이르게 한다. 그것을 욕망보다 훨씬 차원 높은 서원(誓願)이라고 한다.
바르트: 중국·한국·일본의 선사들이 읊은 시를 읽어보면 잘못 이해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어떤 것은 교학을 시 형식으로 나타낸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서정시처럼 자연을 노래한 것도 있어 보이는데 그것이 깨달음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법현: 교수께선 제대로 읽고 제대로 느끼신 것 같다. 저도 수행의 과정에 있으니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깨달음의 시란 그런 것들이다. 이론 즉 불교교학이나 신학을 깨닫고 나서 그를 표현하는 형식은 논리구조를 설명하거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자연이 바로 깨달음의 내용 아닐까 싶다. 불교 전통에서는 절대자의 창조와 섭리를 따르지 않지만 그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론적으로는 신학이 될 것이며, 사실적으로는 보태거나 뺄 것 없는 자연 그대로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싶다.
바르트: 그런 면에서 나는 기독교를 개혁한 마르틴 루터의 신학과 신비주의를 관심있게 보고 있다. 불교의 신비주의란 어떤 것인가?
법현: 합리적 사고라는 것의 어려움과 사람의 부족함을 메우는 듯한 절대자의 힘을 믿는 분들은 신비주의에 끌리는 것 같다. 그래서 같은 잣대로 불교 사상들도 살피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는 신비주의가 없다. 고타마 싯타르타라는 사람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서 불교의 입장에서 신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서 같은 경지에 이르게 하니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모를 때에는 신비롭지만 알고 나면 신비롭지 않다. 부처라는 말이 인도 고어 buddha이고 이 말은 ‘깨달은 이’, ‘눈 뜬 이’, ‘안 이’라는 뜻이다. ‘안 이’이니 신비하지 않을 것 같다.
교통사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정상적이지 않고 예측하기가 쉽지 않아서 ‘사고’라고 부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고가 나게 운전하거나 상황이 만들어져 벌어지는 일이 사고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세의 기적을 보자. 지금도 그것을 기적이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기적이지만 요즈음은 달과의 인력관계 속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 일반인들은 신기하게 느끼겠지만 실제로 깨달은 사람에게는 ‘알 만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따름이다.
기독교 ‘메시아’와 불교의 ‘미륵’은 일맥상통
바르트: 미래의 부처가 있다고 하는데 그는 누구인가?
법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부처가 되기 전 수행할 때의 이름을 보살이라고 한다. 깨달음은 ‘보디’(bodhi), 태어난 존재(중생)는 ‘삿타’(satta) 또는 ‘삿트바’(sattva)라고 한다. 삿타는 빠알리어, 삿트바는 산스크리트어다. 여러 생에 걸친 보디삿타의 과정을 걸친다고 한다. 오랜 세월 수행한다는 의미라고 본다. 그때 실천하는 것 가운데 ‘한량없는 마음’(無量心)이라는 것이 있다. 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랑(慈), 연민(悲), 기쁨(喜), 평온(捨)이다. 인도 고어로는 metta, karuna, mudita, upekkha다. 그 가운데 사랑이 바로 미래의 부처님 이름이다. 빠알리어 멧따가 산스크리어로는 마이트레야다. 이 말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을 우리 발음으로 ‘미륵’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언어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인도의 metta와 메소포타미아의 metia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messiah의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즉 사랑의 구세주, 재림주인 메시아와 미래의 부처님의 이름과 뜻이 같다는 말이다. 이것을 나는 미래의 부처님이 계시고 구세주가 계셔서 오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분은 모든 존재들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덕성으로 가진 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어에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지시대명사를 ‘자기’(self)라고 쓰는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전혀 다른 성(姓)씨와 성(性)을 가진 이를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만큼이나 또는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이”라는 뜻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믿음·소망·사랑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도 비슷한 뜻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날 바르트 교수와의 대화를 이끈 법현 스님의 열린선원은 재래시장 2층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매년 12월 둘째 일요일에 예수님 탄생축하 법회를 천주교 신부, 기독교 목사들을 초청하고 이 사찰 신도들은 성탄 축하찬송을 부른다. 바르트 교수는 “정말 멋지다. 이웃종교와도 함께 하며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모습이 상상된다”며 “불교에 관한 궁금증이 많이 풀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