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28] 이명박과 정두언의 경우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어렵게 권력을 차지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주변을 무자비하게 정리하고, 권력자의 옆에서 킹메이커의 역할을 한 자는 자신의 공로를 과신하여 분수에 넘치는 일을 도모하여 화를 입게 되는 사태가 역사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궁극적 이유는 자신의 욕구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MB와 정두언 의원과의 관계
그러한 현상은 한국의 근?현대정치사의 중심 테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두환 대통령 때 장세동, 노태우 대통령 때 처사촌 박철언, 김영삼 대통령 때 그의 아들 김현철, 김대중 대통령 때 박지원, 노무현 대통령 때 문재인, 이명박 대통령 때 그의 친형인 이상득 등 2인자의 지위를 떠올리면서 그들 관계의 궁극적 결말을 인간의 본질에 비추어 반추해보기 바란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2인자까지는 아니지만 정두언 의원과 이명박 대통령(MB)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정두언은 MB의 대통령 당선에 공신 중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MB집권 후 MB에 의해 내쳐져 사실상 토사구팽당한다. 그러다가 정권 후반기에 현역의원으로서 구속까지 된다. 그는 구치소에 수감되면서 “나는 이 정권 내내 불행했다. 그들은 누릴 만큼 누렸다”고 억울해 했다. 정권이 바뀐 후 그는 그의 구속 사유였던 정치자금법 위반혐의가 법원에 의해 무죄로 확정됨으로써 억울함을 다소나마 풀 수 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토사구팽은 인간의 자연스런 현상이다
토사구팽은 정치는 물론 인간사 전반에서 작용하는 어떤 법칙과도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왜 유방은 한신을 제거했을까? 왜 1인자들은 2인자의 존재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을까? 왜 합심하여 잘 지내지 못하고 서로 헐뜯고 시기하는가?
나는 이러한 물음을 던지면서 철학자 칸트가 평생을 통해 추구한 네 가지 질문들을 되새겨 본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①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②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③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후 <논리학> 서문에서 “④인간이란 무엇인가?”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던진 네 가지 질문은 모든 사람들이 늘 성찰해야할 궁극의 화두다.
나는 칸트의 철학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가 던진 네 가지 질문으로 내가 추구해야할 삶의 지표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참다운 지식의 요체를,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정의의 요체를, 나는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참다운 욕망의 실체를 늘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런 물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나의 지식과 정의관과 욕망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확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 그런 마음이 더 깊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절제되지 않은 욕망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희망과 욕망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희망은 인간의 보편적 염원과 관련이 있지만 욕망은 개인의 특별한 요구와 연결이 되어있다. 보편의 요구와 개인의 요구를 구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칸트는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와 “사람을 수단으로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의 목적으로 대하라”는 두 가지 도덕법칙을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1인자와 2인자가 칸트의 도덕법칙을 준수한다면 토사구팽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도자의 의지는 지도자 개인의 특별한 준칙이 아니라 백성 모두가 따를 수 있는 보편의 준칙이다. 자신을 도운 공신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했다면 역사에서 토사구팽이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그 물음을 던진 칸트조차도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죽기 직전 그가 고심 끝에 한 대답은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라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대大철학자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엿보이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모든 결점이 그 말 하나로 덮어질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토사구팽이 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실존과 도덕을 지배할 수는 없다. 환난과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는 길은 바로 도덕에 대한 믿음에 있다고 본다. 정치, 즉 다스림의 근본은 바로 보편의 도덕으로 상식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