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00일, 못 떠나는 영혼 위해 구할 건 하느님 자비와 평화
[아시아엔=심정택 경제평론가, <이건희傳> 저자]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면 남녀 주인공이 길에서 이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스토리 이별을 보는 나는 고통스럽다. 그냥 고통스럽다. 그러면서 순간,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건 죽음이다.
순간순간 살아야 될 이유가 없는 국면에 이르면, 주변상황에 따라 자살도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영원불멸의 예수님과 그가 매달렸던 십자가를 보았다. 십자가는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가 올리브 나뭇잎을 물고 내려오고 있다.
‘천년의 몽환’이라는 전시를 한 적이 있다. 석채 작업을 하는 강성원 선생의 전시였다. 고려 불화는 비단에 석채 작업이다. 천년을 간다고 한다. 거기서 전시 타이틀을 땄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와 같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자의 눈, 시각을 자주 이야기한다. 절대자가 보는 인간의 유한한 삶의 기간, 100년이라고 보자. 참으로 잠깐 지나간다고 한다. 절대자에게는 천년도 그리 긴 기간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딴딴히 봉해 놓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유해는 천년 정도 흐르면 흙먼지처럼 흩날리는 게 순리다.
가끔, 100수를 넘기고 세상을 떠난 외할머님의 유해가 바람 따라 깨끗한 산 계곡을 따라 여행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2014년 7월, 세월호 침몰 약 3개월이 흘렀을 때다. 언론계 지인을 만나 점심을 하고 차를 한잔 하는데, “모든 것이 세월호에 발목이 묶여있다. 경제활성화를 위해서도 세월호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결국 세월호의 문제는 경제활성화를 위해 묻어 두어야할 게 아니고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는 게 이번 광화문 촛불혁명에서 드러나지 않았는가? 세월호는 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고통이다.
세월호 침몰 수개월 후, 여름의 말미에 안산을 방문한 적이 있다. 전철의 에어콘 돌아가는 소리, 레일의 브레이크 파열음 소리 등 하나 하나 왜 이제 왔느냐는 질타로 들리는듯 했다. 사람들의 무표정하고 무신경한 시선, 한 철 지난 택시 승강장 옆 플랭카드의 펄럭임 등. 무거운 공기가 누르고 있었다. 살아있는 인간들의 숨소리와 억울해 구천을 떠돌고 있는 아이들의 영혼이 공존하는 그런 무게감이 땀내와 섞인 듯했다.
인간은 천년을 살 수 없다. 천년을 희구할 뿐이다. 예술은 어찌 보면 유한한 존재인 인간들의 살다갔다는 흔적이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절대자는 존재한다. 절대자는 인간이 살다간 흔적과 살아가고 있을 나약한 인간들의 허망을 위로하고 영성을 이끌 것이다.
동지도 지나고 날이 조금씩 길어진다. 해가 뜨는 시각, 누구나 가지고 있을 고통 속에서도 살아야할 한 가지 분명한 이유는 세월호뿐만 아니라 앞서 간 많은 억울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기도로, 그들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는 식사 후에 아름다운 기도의 구절을 항상 가슴에 품는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