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그 5천년의 생얼⑪] 이슬람 상인의 3가지 장점···시장절대주의·기사도 정신·모험적 비지니스

[아시아엔=김영수 국제금융학자] 조선시대의 건국에 꼭 나오는 이야긴데, 고려조의 불교 사원이 경제적으로 요사이 한국 재벌들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발생한 모순 이야기가 꼭 나온다. 이씨 조선이 배불정책을 썼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바로 이 무진회사들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다.

전세계의 은은 은본위제도를 시작한 중국으로 은이 빨려가고, 중국 물건이 필요한 유럽인들은 이것을 사기 위해 은이 필요했다. 이에 유럽인들은 은이 많은 신세계로 진출했던 것처럼, 전세계의 금(金)은 인도의 사원으로 몰렸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과 한국에서는 원래 통화로 사용되어야 할 금속들이 녹여져서 사원의 종과 불상 등으로 많이 사용됐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진회사가 받는 실질 이자는 더욱 높아진다. 결국 사원이 그 지역사회의 거의 모든 재산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다 돈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거야”라고 설명하면 이상하게 아귀가 정말로 잘 맞는 사건이 많다는 거다. 특히 종교 관련 사건들은 대부분 그렇다. 왜냐? 원래 종교가 돈 때문에 발생한 ‘돈 적(的)인’ 존재라서 그런 거다. 이와 같이 Graeber는 이야기한다.

다음으로 이슬람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여기서도 이슬람과 빚 그리고 돈의 관계에 관해 논하자면, 웬만한 상식인들이 펄쩍 뛸 일이 몇 개 튀어나온다.

첫째, 아담 스미스의 시장절대주의 그리고 가격 메커니즘 신봉이 원래 이슬람 컨셉이라는 것이다.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것도 이슬람은 알라의 손이 작용한다고 진작부터 가르쳤다고 한다. 그랬을 것이다. 원래 ‘아라비아 상인’이라는 말이 있었지, ‘유럽 상인’이란 말은 수세기 뒤에나 겨우 출현한다.

둘째, 원래 유럽에는 기사도 정신, 이런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십자군전쟁을 일으키면서 아랍에 쳐들어가보니 ‘어? 이 친구들 싸우는 게 싸우는 상대가 봐도 너무 폼나는 거다’. 그래서 사실 자기들도 그런 사람이라고 억지로 우기기 시작한다. <아서왕의 이야기>란 것을 프랑스 사람이 쓰는데, 거기에 기사도 정신이 출현한다. 늘상 긴 창으로 싸움을 하고, 챔피언이 되고 미녀을 위해 괴물과 싸우고…대부분 아서와 이야기에서 시작한 허구의 로망이다.

그 허구성을 통박한 것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다. 중세사회를 풍자한 허구의 소설이 아니다. 돈키호테가 풍자가 아니라 리얼한 서술을 한 것이고, 오히려 기사도 정신의 로망들은 전혀 사실성이 없는 허구였다. 우리가 주로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집단들은 주로 산에서는 산적질, 바다에서는 해적, 길에서는 길 막고 행인에게 시비 걸어 통행료나 뜯는 자들이었다. 지리적 환경에 따라 업종 변환을 민첩하게 하고 있었는데,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소설을 통해 당시 기사생활의 이면을 다소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셋째. 이슬람의 이상형 인간은 젊어서 모험적인 비즈니스를 하여 거부가 돼 대저택을 지니고, 호사스러운 노년생활을 하는 상인이다. <신드바드의 모험>은 거부들의 젊은 시절 경험담을 모은 것이다. 물론 과장된 측면도 있다. 가령 “1대15로 연장 든 놈들과 싸우는데, 퍽 하고 아구를 돌리니 뒤에서 이단 옆차기가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잠깐 피했더니 총을 쏴 피하며 수도를 날렸더니 퍽 쓰러지는 걸 5미터 뛰어오르며 세바퀴를 돌아서 일곱번째 넘을 연환축으로 급소를 가볍게 공격하고 살짝 착지했다”처럼 말이다. 애교삼아 가미가 된 것은 재미있게 읽고 기억하면 되는 것이지 그걸 꼭 허풍이라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Poetic Lisence라는 말 정도로 이해하면 될 일이다. 누군가 허풍을 치면 일단 재미있나를 보고, 재미있으면 신나게 들으면 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종교행위와 경제생활, 아프리카 여러 종족의 이야기들은 이 책 속에 무궁무진하게 소개돼 있다. 하도 많아서 일일이 옮기기 어려울 정도다. 그 중 내가 약간 탄복한 내용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나는 몇 년 전에 <다시 쓰는 맥주 이야기>라고, 맥주의 기원과 관련해 인류학, 고고학 측면에서 책을 저술한 적이 있다. 그 책은 한국에서도 상당히 히트 쳤고, 미국 알리바마대학의 인류학과에서 교과서로 채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속에 미국의 시애틀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관해 언급했다. 지금의 유엔총회에서 읽어내려도 특A를 받을 정도로 너무나 훌륭한 문장이어서 나는 “그 문장이 후세의 유럽식 문학을 충실히 공부한 환경론자들이 만들어낸 위작일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무식의 소치였다.

미국 인디언 부족의 추장들은 무력이나 재력을 가지고 부족을 통치하였던 것이 아니다. 연설을 통하여 감동을 주어서 그것으로 부족을 통할했다. 인디언 부족 추장들의 말솜씨는 가히 전세계 어느 시대 어느 정치인들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난 그걸 몰랐는데, Graeber의 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역시 이 친구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몇 배를 더 아는 친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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