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그 5천년의 생얼⑬] 빚이 화폐로 표시되는 순간 ‘노예화’ 시작

[아시아엔=김영수 국제금융학자] 나는 자본주의가 화폐경제인 데 대해 절대 동의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벌어도 많은 인구가 결국 노예상태로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악순환 사이클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참고로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였지만 여전히 국제기축통화로서의 위치를 누리는 것은 영어권 금융제도의 상대적 공정성도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모든 상품 중 대종상품인 석유를 반드시 미국 돈을 주고 사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그 기초 중의 기초란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중국도 그러한 것이 없는 한 달러를 위협할 정도로 기축통화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화폐가 물물교환시 불편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편의와 요구에 따라 착취도구로 쓰였다는 ‘화폐의 폭력기원설’을 제기했다. 그러면 빚과 화폐는 어떤 관계로 이어지는지 살펴보자.

2. “빚이 일단 화폐로 표시되면 노예화가 시작한다.”

화폐가 발생하기 전의 빚은 다중 인간관계에 복잡하게 얽켜있었다. 내 닭을 가져간 박서방은 내 딸의 시아버지이기도 하고, 고모의 시숙의 당숙의 매제이기도 하고, 5년전 우리 소가 헤쳐 놓은 밭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부채로 가지고 있는지 그렇게 쉽게 판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폭력현상으로 화폐가 일단 생성되고 난 뒤는 빚이 화폐로 표시되어 버린다. 닭은 다섯냥, 그걸 안 갚으면 1년에 이자 20%, 내년엔 여섯 냥 이렇게 숫자로 단순화 일차원화 된다. 즉 모든 인간관계가 일차원화로 단순화된다.

‘내 닭을 가져간 박서방은 내 딸의 시아버지이기도 하고, 고모의 시숙의 당숙의 매제이기도 하고, 5년전 우리 소가 헤쳐놓은 밭의 주인이기도 하고’…이런 관계가 아주 심플하게 ‘다섯냥 안 갚은 사람’으로 정리된다. 그 모든 복잡계적이고 다중적이고 무한 변화가 가능한 인간관계가 다섯냥으로 신기할 정도로 단순화돼 버린다.

당신이 소설가, 대사상가, 철학자인데다 미남이라고 하자. 그런 당신의 모든 아름답고 찬란하고 풍부하고 다채롭고 다양한 인격의 구성요소들은, 당신이 얼마의 빚을 못 갚으면 한 순간에 ‘신용불량자’ 이 한 마디로 이 사회는 정리해 버린다. 화폐가 발생한 후 그렇게 돼버린 것이다.

아주 오랜 친구와 최근까지 비즈니스를 같이 했는데 이 친구가 내게 진 상당한 채무를 갚지 못했다. 그리곤 실질적으로 파산상태에 들어가 버렸다. 그 전의 우정, 추억, 같이 나눴던 이야기 등등 이 모든 것이 “그가 내 돈 XX를 떼어먹었어”의 XXX라는 숫자 하나로 정리가 되어버렸다. 참 슬펐다.

나 자신 그 친구 생각을 해도 XXX라는 숫자 밖에 생각이 안 난다. 그 복잡하고 다양했던 오랜 친구 사이가 XXX를 떼어먹은 놈, 숫자 하나로 정리되는 것이 솔직히 참 슬펐다. XXX라는 의미는 “XXX를 내 구좌에 넣지 않으면 국가폭력을 동원하겠다”는 뜻이다. 사기로 고소고발하여 감옥에 보내겠다는 의미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언제고 걸리면 그럴 수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거다.

차라리 처음부터 비즈니스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면, 같이 등산도 가고, 같이 낚시도 가고 그랬지 않았겠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부부관계도 상당히 많은 경우 지참금과 위자료로 정리된다. 보고 싶어서 가슴 졸이던 그 연인, 가랑잎 한 잎에도 센티하게 눈물 적시던 그 님, 비가 와도 바람 불어도 님 생각…이 모든 것이 위자료 YYY원으로 압축되어 버린다. YYY는 인생에 왜? 라는 대질문을 3번 던지는 행위가 아니라, YYY를 내 구좌에 넣지 않으면,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널 괴롭히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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